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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6편. 허심(虛心)의 공간미 담은 대나무 그림

[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6편. 허심(虛心)의 공간미 담은 대나무 그림

2016/05/17

 

<사군자, 다시피우다>

군자가 사랑한 네 가지 식물을 오는 5월 25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사군자, 다시피우다>전에서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데요. 그에 맞춰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는 사군자와 사군자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여섯 번째 이야기로, 대나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 합니다!

옛사람들에게 대나무는 특별한 의미를 주는 존재였습니다. 뾰족이 올라온 죽순은 더없이 좋은 먹거리였고, 각종 생활 도구의 재료로 쓰여 삶을 편리하게 했는데요. 생활 속의 이로움과 함께 문인들에게는 유교를 토대로 형성된 동아시아 지성의 상징물로서 사랑을 받았죠.

대나무에 대한 애정도 여러 가지여서 사람들은 여건에 따라 대숲을 조성하거나, 화분에 길러 가까이 하기도 했고, 이를 그림으로 대신해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묵죽에 대한 애호는 끊임이 없어, 문인들 스스로도 즐겼을 뿐 아니라 화원 화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그려졌는데요.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을 뽑는 시험에서 산수 인물보다 묵죽에 더 많은 배점이 주어진 것은 묵죽화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매운 바람을 견디는 절개

조선시대 최고의 묵죽 화가로 꼽히는 인물은 단연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입니다. 세종대왕의 현손으로 석양군(石陽君)이라는 작호를 받았고, 서화에 능하여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종실 출신의 화가입니다. 그는 굵은 대나무를 힘차게 그려낸 통죽(筒竹), 바람을 맞고 선 풍죽(風竹), 비 맞아 잎이 쳐진 우죽(雨竹), 눈을 덮고 꿋꿋하게 서있는 설죽(雪竹) 등 다양한 대나무의 모습을 여러 기법을 사용하여 자유자재로 그려내었죠.

이정 노년의 원숙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죽도(竹圖)>입니다. 이 작품은 하단에는 바위를 배치하고 농묵으로 그려낸 대나무와 상단에 담묵으로 중단의 대나무와 비슷한 모습을 그린 삼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담묵으로 농묵의 가지와 비슷하게 그린 가지는 마치 그림자 같기도 하면서 화면에 변화를 주었는데요. 우측 하단에 쓰인 관서를 통해 그의 나이 69세인 1622년 봄에 만년 은거처인 공주의 월선정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정,  <죽도(竹圖)> 비단에 먹, 119*57.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정 묵죽의 다양한 모습은 41세인 1594년에 완성한 『삼청첩(三靑帖)』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그의 개인 소장 <풍죽(風竹)>은 현재 통용되는 오만 원 권에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유명한 이정의 화풍은 한국적인 묵죽화의 전형을 이루어 후기 양식의 바탕이 되었습죠. 이정의 조카인 김세록(金世祿,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학자이자 독특한 전서의 서예가로도 유명한 허목(許穆, 1595-1682), 좌의정을 지낸 조익(趙翼, 1579-1655) 등도 당시 묵죽화를 남겼습니다.

조익, <죽도> 종이에 채색 100.9*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익의 <죽도(竹圖)>는 굵은 왕대의 흔적 옆에 새로 난신죽(新竹)을 표현한 듯 푸른색으로 생생한 대나무를 그려 이채롭습니다. 중앙의 대나무는 화면 위쪽에서 더 이상 몸을 펼 수가 없다는 듯 옆으로 굽어있는데요. 마치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굽혀야만 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죠. 조익이 살았던 선조에서 효종 때까지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등 조선시대 가장 치욕스러운 전쟁이 잇달아 일어났는데요. 그림 속의 구부러진 대나무는 이 시기에 벼슬을하였던 사대부로서 하늘을 볼 수 없는 부끄러움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어있는 공간의 아름다움

조선 후기에 묵죽화로 유명한 화가로는 유덕장(柳德章, 1694-1774),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신위(申緯, 1769-1845), 임희지(林熙之 1765-?)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묵죽화는 각자 조금씩 개성있는 화풍을 형성했습니다.

유덕장,<목죽도6곡병> 종이에 수묵, 각 92.5*52.5cm, 개인소장

유덕장은 조선 초기의 묵죽 화가인 유진동의 6대 손으로 호는 수운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사대부입니다. 그는 많은 유작을 남겼는데, 추사 김정희가 그의 묵죽도의 제에서 “수운의 죽은 창경하고 고졸하여 팔목에 금강저가 갖추어 있다”고 한 것처럼 대나무의 굳건한 이미지를 표현한 듯 날카롭고 강한 모습의 통죽을 잘 그렸죠. 또한 녹죽, 금니로 그린 대나무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린 그림은 대나무의 표현 영역을 한층 넓혀주었습니다.

사군자에 두루 능했던 강세황은 “대나무와 매화를 그릴 때는, 공간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공간을 여유 있게 구성해 시원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그가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사군자를 그릴 때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세황의 묵죽을 가만히 보면 전체적으로는 유연하면서도 강직한 대나무의 특징이 잘 드러나 보이죠.

신위<선면목죽> 종이에 수묵, 17.4*56cm, 개인소장

강세황의 묵죽에 이어 신위의 묵죽에서도 대나무 줄기를 길게 남겨 여유와 멋이 느껴집니다. 신위는 판서와 도승지를 지낸 전형적인 사대부로 시·서·화에 모두 능한 문인 화가입니다. 그의 묵죽은 강세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실제 남아있는 작품에서 보면 강세황에 비해 줄기가 가늘고 탄력이 있으며, 잎도 필치가 부드러워 더욱더 고아한 풍취가 있습니다. 신위는 특히 시에 뛰어나 그의 묵죽화에는 단아한 그의 글씨로 쓴 적절한 제시가 함께 어울려 묵죽의 품격을 높여줍니다.

김홍도, <목죽> 종이에 수묵, 23*27.4cm, 간송미술관 소장

화면 구성의 시원한 느낌은 김홍도(金弘道, 1745-?)의 <묵죽(墨竹)>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선방향으로 화면을 가로질러 대나무 줄기가 비스듬히 서 있고 줄기의 아래쪽에는 댓잎이 무성하게 나있는 구도로, 대나무의 중간 부분을 클로즈업해 시원스럽게 구성한 것이죠. 군자의 상징으로서 사대부들이 즐겨 그렸다는 묵죽화이지만화원 화가들 사이에서도 많이 그려졌습니다. 화원 화가이지만 사실 김홍도는 사대부 못지않은 풍류를 즐겼던 화가였죠.

댓잎에 서린 문인들의 의취

이후 조선 말기에는 우봉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소치 허련(許練, 1809-1892), 신위의 아들인 애춘 신명연(申命衍, 1809-?), 춘방 김영(金瑛, 1837-?), 사호 송수면(宋修勉, 1847-?), 석촌 윤용구(尹用求, 1853-1939) 등이 개성 있는 묵죽을 많이 남겼습니다.

조선 말기와 근대의 묵죽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운미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묵죽에서 일 것입니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당시의 혼란스러운 나라 사정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고종의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상해에 피신해 있으면서 청대의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 유명한 서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개성 있는 작품을 남겼는데요. 그의 <묵죽(墨竹)>에서 보이는 끝이 잘린 대나무는 그의 묵란에서 보이는 난 잎의 뭉툭한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의 강한 개성을 보여주는 부분이죠.

김규진<설죽(10폭 병풍)> 천에 수묵, 130*37.4cm, 인주문화재단 소장

민영익의 묵죽과는 또 다른 개성을 보인 것이 김규진의 묵죽입니다. 그는 1855년부터 8년간 청나라에 유학을 했고,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해강죽난보(海岡竹蘭譜)』와 『서법진결(書法眞訣)』이란 저서를 남겼는데요. 그는 다양한 형태의 대나무를 그렸으며,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려 이후 근대화단에 통죽이 크게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김규진의 뒤를 이어 근대 묵죽화의 길을 활짝 연 사람이 김진우(金振宇, 1883-1950)와 고암 이응로(李應魯, 1904-1989)입니다. 김진우는 김규진이 개설했던 서화연구회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으며, 사군자를 두루 잘 했으나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습니다. 그의 묵죽은 마치 바람결이 느껴질 듯 떨림이 있는 잎과 현대적인 구성미가 돋보입니다. 김진우는 대나무 그림을 팔아 독립군 자금을 댔다고 할 만큼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인 화가였죠. 대쪽 같은 선비를 상징하는 대나무 그림이 나라를 구하는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다니 그 의미가 더욱더 깊게 느껴집니다.

묵죽도는 현재까지도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집니다. 대나무의 강한 생명력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죠. 곧고 푸른 대나무는 그 청정하고 굽힐 줄 모르는 기상으로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이끌어주는 스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진우, <묵죽(불유분용)> 종이에 수묵 140.5*39cm, 개인 소장

글 이선옥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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