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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5편. 서리를 이긴 은은한 향취의 국화 그림

[포스코미술관 특별 기고] 5편. 서리를 이긴 은은한 향취의 국화 그림

2016/05/11

 

사군자, 다시피우다

군자가 사랑한 네 가지 식물을 말하는 사군자! 오는 5월 25일까지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사군자, 다시 피우다>전에서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데요. Hello, 포스코 블로그에서는 사군자 그림과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섯 번째 이야기! ‘국화와 국화 그림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함께 보실까요~?

세속과 벗하지 않는 은자

옛 문인들은 국화 한 포기를 얻으면 봄, 여름 고이 갈무리하여 가을에 홀로 피어나는 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고, 화분에 가득 담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흔한 꽃이지만 의미도 깊고 귀한 국화를 언제나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국화 그림인데요. 인내와 지조를 지키는 군자의 상징으로서 시문과 서화는 물론 장식미술의 소재로서도 국화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초·중기까지만 해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는 궁중을 중심으로 국화를 감상하고, 국화주를 마시며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고받는 행사를 했었습니다. 조선시대 일찍부터 국화 그림이 그려진 기록은 있지만 실제로 그림이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홍진구,<국화> 종이에 채색, 37.6*32.6cm, 간송미술관 소장

17세기에 활동하였던 홍진구의 국화 그림은 조선시대 국화 그림 중에서도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입니다. 왼편 하단에서 피어난 한 그루의 국화와 나리꽃처럼 생긴 붉은 꽃을 함께 그린 것인데요. 가지와 잎은 먹을 툭툭 찍고 농묵으로 잎맥을 그려 자연스러운 국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왼편 상단에 쓴 방장산옹사(方丈山翁寫)라는 호 때문에 홍진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국화에는 여러 색이 있지만 옛날에는 어떤 색깔보다도 노란 국화를 으뜸으로 생각했다고 하죠. 노란색은 다른 색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대지의 색깔로서 음양오행에서는 중앙을 상징하고, 이는 곧 왕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수묵을 위주로 하였지만 담채를 더하여 맑은 채색이 주는 담백함과 섬세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야위고 소박한 국화꽃은 누구와도 벗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순박함이 있죠.

윤두서, <괴석죽국> 종이에 수묵, 27.5*56cm, 개인소장

묵국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인데요. 국화 그림은 국화만 단독으로 그린 경우보다는 괴석이나 대나무 등과 국화를 함께 그린 경우가 많습니다. 자화상과 풍속화로 유명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괴석죽국(怪石竹菊)>은 부채에 괴석, 대나무와 함께 국화를 그린 것입니다.

꽃잎 하나하나를 가는 선으로 꼼꼼히 그리고 이에 호분을칠하여 흰 국화의 느낌을 살렸죠. 괴석이나 대나무, 국화가 거의 같은 비중으로 그려져 있고, 국화에는 난인지 혹은 들풀인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기다란 잎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괴석이나 대나무와 함께 국화를 그리는 형식은 당시 유행하던 여러 화보(畵譜)에서도 예로서 다루어지던 것입니다.

윤두서의 경우 『고씨화보(顧氏畵譜)』를 소장하였을 뿐 아니라, 화보를 보면서 그림 공부를 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요. 국화 그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서리를 이겨낸 절개

허필, <국화> 종이에 옅은 채색, 26.7*18.7cm, 서울대박물관 소장

18세기 문인 화가 연객(烟客) 허필(許佖, 1709∼몰년 미상)의 〈국화(菊花)〉는 단장을 한 듯 꽃송이가 단정한데요. 중앙에는 가장 큰 가지를 두고 그 아래에 조금씩 키 작은 가지를 두어 균형을 잡았고, 땅에는 잡풀을 함께 그려 안정감 있는 구도를 이루도록 했죠. 수묵에 연한 담채를 하여 크게 공들여 그린 것 같지 않으면서도 여유로운 향기가 풍기는 것은 그의 얽매이지 않는 성품 때문일 것입니다.

시 읊기를 좋아했고 전서와 예서를 잘 썼던 허필은 가난한 오두막집 비탈진 계단에 갖가지 국화를 줄지어 심어놓고 그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명리를 떠난 선비와 국화는 수 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친구인 모양입니다.

정조, <야국> 비단에 수묵, 51.4*84.6cm, 동국대박물관 소장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1752~1800)의 <야국(野菊)>은 담백하면서도 간결하게 그려진 국화와 풀벌레의 재치 있는 표현으로 문예부흥을 주도해나간 슬기로운 군왕의 면모가 엿보입니다. 상하로 긴 화면 좌측 중앙에 둥근 바위를 가운데 두고 위아래로 두 포기, 가운데 낮게 한 무리의 국화가 피어있죠.

꽃은 엷은 먹으로 부드럽게 그린 반면 잎은 끝이 날카롭고 좀 더 진하게 표현했는데요. 때로는 진하게 때로는 연하게 먹이 마치 살아있는 듯 자유자재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있습니다.

이인상<병국도> 종이에 먹, 28.6*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화폭에 담고자 하는데, 말라비틀어진 국화 한 포기를 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18세기에 활동하였던 문인 화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입니다. 그는 갈필로 스케치를 하듯이 고개 숙인 국화 한 포기를 그리고, 이에 ‘병든 국화를 겨울날 그렸다(南溪冬日寫病菊)’고 써놓았죠.

그런데 시든 국화 한 그루는 마치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아 안타까운데요. 이인상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서출이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은 할 수가 없어서 글씨와 그림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8세기에는 국화재배가 늘고, 이를 완상하는 문화도 발달하면서 국화도가 급격히 많아졌는데요. 국화는 대부분 단독으로 그리기보다는 바위나 대나무, 들풀과 함께 그려 그 의미를 더하고 구도상 안정감을 더해주었죠. 국화 종류가 많아진 만큼 그림 속의 국화도 꽃잎이 길고 짧고, 가늘기도 하고 도톰하기도 하면서 국화 그림도 다채롭게 전개되었습니다.

동쪽 울타리에 핀 아름다운 꽃

19세기는 조선시대 회화 전반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국화도에도 형식 면에서나 화풍에 여러 변화를 보였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형식상의 변화는 화폭이 상하로 길어지고 제시가 많아진다는 점인데요. 필치가 분방해지고 장식적인 경향을 띠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죠.

윤제홍,<난국괴석도> 종이에 수묵, 24.5*38cm, 개인 소장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 1764~1840)의 <난국괴석도(蘭菊怪石圖)>는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린 듯 독특한 필법으로 그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인데요. 마치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뭉쳐진 바위 아래서 뻗어 나온 국화와 난의 형태는 선뜻 수긍할 수 없는 파격의 미가 있습니다. 괴석과 국화도 독특하지만 오른 편에서 쓰기 시작하여 왼편으로 연결되게 한 화제 또한 파격적이죠.

“윤경도 제홍은 읊노라 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롭네. 가인을 그리워함이여, 능히 잊지 못하리(尹景道濟弘言. 蘭有秀兮, 菊有芳. 懷佳人兮, 未能忘).”라 했는데요. 화제를 쓴 글씨도 그림과 어울려 개성을 더해줍니다.

안중식,<동리가색> 종이에 수묵, 17*80cm,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집을 둘러친 울타리는 사방에 있음에도 유난히 동쪽 울타리에 핀 국화를 그렸다는 그림이 많습니다. 이는 중국 육조시대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음주(飮酒)』라는 시 중에 “동쪽 울타리에 핀 국화 한 송이를 꺾어, 망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구절 때문입니다.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살아가는 그의 삶의 한 장을 보여주는 구절로 많은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고, 국화는 응당 동쪽 울타리에 피어있는 것처럼 인식되었죠.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동리가색(東籬佳色)>을 보면 괴석과 국화, 들풀이 어울린 구도는 앞서 많이 보던 그림과 비슷하지만 국화 꽃잎이 유난히 길고 꽃송이도 큽니다. 꽃이 큰 국화 그림은 그의 작품에서뿐 아니라 같은 시기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 1876~1934)이나 화산(華山) 김일(金鎰, 미상~1934이후)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어서 이 시기 국화도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김진만<석국>종이에 먹 140*34cm 개인 소장

또 한편으로는 화가들이 국화를 선비들의 뜻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식물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보기에 좋은 크고 탐스러운 것을 선호한 것도 한 이유일 것입니다.

국화도는 근대로 이어지면서 군자나 은일을 상징하던 모습보다는 장식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요. 국화를 표현하는 방식은 시대나 화가에 따라 다르지만 복잡한 세상을 떠나 조용히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벗이 되어 올해도 어느 울타리 아래서 말없이 피어날 것입니다.

글 이선옥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hk연구교수

Hello, 포스코 블로그가 소개해드리는 국화와 국화 그림의 이야기,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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