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제철소의 심벌은 누가 뭐라 해도 고로다. 압도적 규모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형산강 다리를 건너면서 마주하게 되는 포항제철소의 고로군(高爐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파리의 에펠탑과 같은 대한민국 산업의 랜드마크라 해도 넘침이 없다.
이 고로라는 거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뜨거운 열기를 품고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탓에 예민해서 알뜰살뜰한 보살핌이 필수다. 따라서 고로를 위한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주치의가 필요하다. 그런 고로를 평생의 벗이자 동반자로 여기며 살아온 기능인, 고로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을 품은 김수학 명장을 만났다.
김수학 명장이 인연을 맺은 첫 고로는 ‘주물선고로’였다. 주물선고로란 무엇인지, 또 그 역할은 무엇인지 묻자 그는 고로 전문가답게 명쾌한 설명을 들려줬다.
“주물선고로도 용선을 뽑아내는 고로입니다. 다만, 일반 고로의 용선과는 성분에서 다소 차이가 있죠. 일반적인 고로에서는 철광석과 코크스로 용선이라는 쇳물을 뽑아내고, 이 용선을 제강공정에서 받아서 취련을 거친 뒤 압연공정으로 보냅니다. 제철공정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제선공정, 그러니까 고로에서 생산하는 쇳물의 양과 제강공정에서 필요로 하는 쇳물이 양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제강에서는 용선이 100만큼 필요한데 고로에서 생산하는 양이 90인 거죠. 이럴 때 주물선고로가 용선 수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강에서 용선이 부족할 경우 주물선고로에서 생산한 용선으로 모자란 양을 보충해 주는 거죠. 반대로 고로 생산량이 제강 사용량보다 많을 경우 주물용 냉선, 즉 괴(塊)의 형태로 만들어 완제품으로 판매하거나 제강에서 사용하도록 하니 용선 생산 밸런스를 맞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시황에 따라 주물용 냉선은 부가가치가 높은 완제품이 되기도 했죠.”
김수학 명장이 처음 인연을 맺었던 주물선고로는 330㎥ 크기였다. 현재 일반고로의 기준으로 보면 아담한 규모다. 이 고로가 그냥 계속 운영됐더라면 그는 인생을 뒤흔들 귀중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의 운명은 지금보다 조금 심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은 김수학 명장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입사 후 몇 년이 지났을 무렵 주물선고로가 1080㎥ 규모의 신주물선고로로 대체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는 고로를 건설하는 단계부터 이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무슨 일이든 다 갖춰진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 무(無)의 상태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 더 힘들죠. 그렇지만 고단함을 잊을 정도로 귀중한 경험입니다. 제게는 그런 경험이 두 번 정도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주물선고로를 건설하는 단계에서부터 참여한 일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하던 일을 하는 익숙함과는 달랐다.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신주물선고로를 새로 짓고 가동 후 조업을 하고… 그렇게 주물선고로와 인연을 맺고 설비관리를 총괄하며 지낸 지 22년이 흘렀을 때였다. 이번에는 그렇게 지은 신주물선고로를 종풍하는, 보기 드문 아픔까지 겪게 된다.
‘종풍’, 설비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폐쇄하는 것을 말한다. 2012년의 일이었다. 종풍 후 보전작업을 거쳐 2021년 이 주물선고로를 완전히 철거하는 공사에도 참여했다.
“주물선고로는 제게 어려움과 기쁨 그리고 아쉬움까지, 희로애락을 모두 함께 했던 설비입니다. 저는 이런 주물선고로를 2기나 역사 속으로 보내줬습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요. 한 사람이 이렇게 한 설비가 태어날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하는 경우가 거의 없죠. 제철소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닐까요?”
주물선고로는 일반고로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고로조업에 필요한 모든 과정은 다 필요하고, 또 고로가 겪을 수 있는 모든 문제 또한 다 겪을 수 있다. 그렇기에 주물선고로와 함께하는 동안 김수학 명장은 고로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김수학 명장은 단지 고로의 일대기를 함께한 것뿐만이 아니다. QSS시범요원으로서 활동하며 다시 한번 불모의 땅을 개간해 농토를 만드는 경험을 했다. 2006년, 포스코가 QSS(Quick Six Sigma)를 도입하기 직전에 시범요원을 뽑았는데, 여기에 김수학 명장이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 그의 삶의 중요한 변곡점에 이를 때마다 방향을 안내해 주는 나침반이 돼줄 정도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QSS를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것에 대해 기본과 원칙에 따라 단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표준화해 하여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QSS개념이 없을 때도 작업을 하고 개선도 했죠. 그런데 그게 어떤 원칙에 근거해 표준화가 돼있지 않으니 할 때마다 달라졌습니다. 또, 노하우가 생겨도 제대로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이 몸에 익혀두거나 머릿속에 정리해 뒀다가 상황에 따라 실행하거나 말거나 하는 형태였습니다. 기본과 원칙이 확실하지 않으니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법이 달랐고, 그 근본 원인을 찾기보다 그저 현상만 무마하려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기본과 원칙에 입각해 가장 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찾아내고 정립해서 향후에는 그 방식에 따라 일하자는 기준’은 반드시 세워야 하고 옳은 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일하던 이들은 낯설어하고 힘들어할 수밖에 없다. 선례조차 없는 ‘시범요원’인 김수학 명장이 이들을 설득하고 이끌어가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말 그대로 ‘시범요원’이었잖아요. 저희들끼리는 스스로를 ‘QSS 0기’라고 하기도 하고, 조금 과장해 ‘특수 요원’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희도 잘 모르고, 현장 사람들에게도 낯선 ‘QSS시범요원 활동’은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문화 차이였습니다. 현장마다 분위기도 각기 다르고, 우리를 이끌어주어야 할 외부 QSS컨설턴트도 철강회사라는 무거운 이미지와 생소한 문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웠던 만큼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소득이 있었다. 일반 업무를 하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웠다. 물론 당시에는 몰랐지만, QSS시범요원으로 활동하면서 익힌 수단과 수많은 개선활동으로 그는 ‘명장’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풍요로운 자양분을 마음껏 흡수했다.
김수학 명장은 이렇게 고로에 대한 전반적 이해와 경험을 쌓고, QSS시범요원 활동으로 원칙에 입각한 업무방식을 습득하는 한편 수많은 개선사항을 찾으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다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애지중지하며 모든 설비를 관리하고 총괄했던 신주물선고로가 종풍을 맞게 된 것이다.
신주물선고로의 종풍은 평생 그가 일해온 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비록 생명체는 아니지만 운명을 함께해온 동반자와 같은 존재를 떠나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신주물선고로를 떠나보내는 김수학 명장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비록 단위 공장이었지만 ‘포스코도 공장을 닫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실로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상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료된다’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에게 또 다른 운명의 숙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동안 임시 보직으로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시간을 보낸 그는 평소 업무 능력을 인정해 준 상사의 배려로 ‘고로 내화물’이라는 새로운 업무를 접했고 업무에 익숙해질 때쯤 새로운 경험과 더 큰 도전을 하고자 해외파견을 떠났다. 포스코의 기술력을 전파하는 동시에 완전히 낯선 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기회를 얻은 그는 그곳에서 내화물에 대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2016년 그가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하고자 선택한 곳은 바로 브라질이었다. CSP(Companhia Siderurgica do Pecem) 제철소에 슈퍼바이저로 파견근무를 갔다. 멀리 지구 반대편,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날아간 그곳에서 김수학 명장은 마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듯한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기후와 문화가 몸에 맞지 않고 사람들도 낯설기만 했다. 짧은 파견 기간이었지만 익숙한 설비, 편안한 땅을 뒤로하고 짐을 푼 브라질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낯설고 배타적이었던 곳에서 소통의 어려움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막막함에 봉착한 그는 심지어 중도 귀국도 고민했다고.
그러나 그는 고로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QSS 분야의 개척자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경험과 전문성, 그리고 그만의 열정을 무기로 그는 서서히 현장을 이끌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새로 놓이는 고로에 포스코의 기술과 노하우를 적용해 성공적으로 가동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타적이기만 했던 현지의 분위기도 점점 김수학 명장의 능력과 진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기술을 그곳에 적용하는 데만 집중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곳에서 무엇을 배워서 우리 현장에 적용할지도 고민했다. 시간 여유가 생기면 근무지와 관계없는 다른 공장과 설비를 찾아다니면서 호기심을 해소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설비가 들어오는 다른 나라의 제철소이니 분명 배울 점이 있을 터였다.
“제철소와 같이 고온의 환경에서 많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내화물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죠. 특히 제가 일해온 고로 분야는 더하고요. 내화물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화벽돌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되 다양한 모양과 성질로 제작된 것을 ‘정형 내화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현장은 꼭 이렇게 모양이 갖추어진 것만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내화물 소재별로 현장에서 혼련(混鍊)작업을 거쳐 설비나 현장 상황에 맞게 거푸집 등으로 모양을 만들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부정형 내화물’이라고 하죠. 부정형 내화물은 도자기를 만들 때 진흙을 물과 반죽해 도자기 모양을 만들고 그걸 구워서 완성하듯이 내화물을 설비의 구조에 맞게 시공하고 건조시켜서 완성합니다. 이때 건조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화물의 본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죠.”
건조작업은 아주 까다롭다. 무턱대고 열을 가한다고 해서 건조되지 않고, 부정형 내화물을 혼련할 때 수분을 잘 빼내야 하는데 이 작업이 재료의 성능과 내화물의 품질을 좌우한다. 수분을 빼내려면 시간에 따라 구간별로 온도를 달리해 점진적으로 승온하며 건조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해진 ‘승온그래프’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기존의 건조 방식은 직화식으로, 오븐에 불을 때서 굽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는 아무리 해도 정해진 승온 그래프에 맞게 내화물 온도를 조절하면서 건조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건조를 마친 결과물인 내화물 품질도 기대에 못 미쳤다. 그런데 CSP제철소에서는 이런 문제를 놀라운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직화식이 아니라 열풍으로 건조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김수학 명장은 무릎을 쳤다.
직화방식에 쓰는 코크스오븐가스는 이산화탄소를 많이 뿜어내는 문제도 있었으니, 열풍건조방식을 사용하면 일석이조였다. 이 열풍건조방식이 독일의 고로전문컨설턴트가 2012년 포항, 광양제철소의 제선부를 방문했을 때 권고한 방식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러나 건조방식 교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의 직화방식은 제철소가 고로조업을 시작한 이후 내내 무려 50년간, 반세기를 지속해온 방식이었다. 오랜 세월 문제없이 해오던 방법인데, 그 방식을 뿌리째 뽑아내고 전혀 새로운 방식을 시작하는 일이 어떻게 쉽겠는가? 하지만 김수학 명장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일이든 맡겨만 놓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도 있었고, QSS시범요원으로서의 겪었던 경험도 요긴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또 풀어야 할 문제가 더 있었다.
“무조건 적용해야 한다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개선작업에 들어갔죠.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열풍건조용버너를 새로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CSP에서 기술공유를 받기 어려운 데다 비용을 들여 사다 쓸 마음도 없었고, 기본 원리는 좋지만 우리 현실에 맞는 것도 아니어서 개발을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 또한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라 쉽지는 않았습니다. 브라질 현지에 당시 유사설비를 공급했던 국내 업체 전문가를 섭외해서 수없이 미팅을 가졌습니다. 이때 CSP에서 관찰했던 바가 큰 도움이 됐고, 전문가들과 연구를 거듭해 송풍지관 열풍건조장치, 대탕도커버 내화물 열풍건조장치를 단계적으로 개발했습니다. 물론 CSP 설비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의 장치를 개발할 수 있었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럽 아르셀로미탈과 TKSE제철소, 독일 버너 제작사 등을 폭넓게 벤치마킹 해 포스코형 대탕도 내화물 열풍건조장치를 설계하는데 성공했으며 현재 장치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도전으로 포스코형 내화물 열풍건조장치 3종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 장치로 대한민국 특허까지 획득했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장치들은 파이넥스 공장과 광양소에도 적용해 내화물 품질 향상과 에너지절감, 안전성 향상, 원가절감, 환경개선 등에 엄청난 효과를 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동안 불가능했던 표준작업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랜 노력을 기울인 장치 개발에 성공하는 순간, 주물선고로가 종풍할 때 느꼈던 ‘뿌리를 내릴 땅을 잃어버린 듯한 허탈감’을 말끔하게 씻었습니다. 새롭게 뿌리내릴 땅과 임무를 찾은 듯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한 길을 걸어온 그의 앞에 명장이라는 큰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명장의 영예를 안은 김수학 명장에게 꽃길만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그에게 태풍 ‘힌남노’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가 도전을 해왔다. 평생 잊지 못할 날인 2022년 9월 6일, 힌남노로 냉천이 범람해 제철소가 침수되면서 정전이 일어났고 고로가 멈췄다. 물론 압연지역과 비교해 볼 때, 고로는 범람으로 인한 직접피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전기였으나 이 또한 전기부문이 불철주야 노력해 준 덕분에 고로가동은 할 수 있게 됐다. 진짜 문제는 고로가 가동돼도 생산하는 쇳물을 받아줄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로가 재가동되면 하루 4000톤에 달하는 쇳물이 생산됩니다. 그런데 제강에서는 하루 3000톤밖에 받아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000톤을 어찌할까요? 과거 제강사고 때 밭고랑 주선기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일한 원리로 처리할 수밖에 없지요. 모래밭에 쇳물을 부어서 고철로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처리장을 ‘사(沙)처리장’이라 합니다. 물론 CSP나 크라카타우포스코 등에는 단위 설비로 처리 능력이 충분한 사처리장이 잘 갖춰져 있고, 1987년 전후 광양소에서 사처리장을 만들어 운용하다가 폐쇄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항제철소에는 이렇게 대량의 쇳물을 처리할 사처리작업을 운영해 본 경험도 전혀 없고, 인프라도 없는 상황이었죠. 이 사처리장을 최대한 빨리 만들고자 9월 8일 긴급 사처리장 조성팀을 구성했습니다.”
하필이면 추석 명절이라 장비도 인력도 구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선 인력은 사처리작업전문가인 퇴직직원을 수소문하고, 광양 제선부, 광양 RM테크 등 협력사 직원 등으로 팀을 꾸려 사처리장 조성을 시작했다. 그런데 옛날 제강사고 때와는 달리 물난리 뒤라 마른 땅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물기 있는 곳에 뜨거운 쇳물을 부으면 폭발 위험이 있기 때문에 마른 땅이 꼭 필요했다. 또, 용선을 운반하는 용선운반차(TLC)가 접근할 수 있는 선로 옆에 만들어야 한다는 위치상 제약도 있었고 가스관 등 안전 상에도 문제가 없는 장소여야 했다.
겨우 조건에 맞는 장소인 냉선야드를 찾아 9000톤의 모래를 긴급 구매해 조성작업을 시작하고, 대형 굴삭기, 비상발전기, 소방차 등 수많은 장비를 동원해 기적처럼 임시 사처리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용선운반차 안에서 쇳물이 굳었기에 온도가 높은 쇳물을 섞어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10대 중 7대를 복구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용선운반차에 실린 용선을 사처리장에 부을 때 용선운반차를 기울일 전력이 부족했다. 선로에 450톤 급 대형 크레인을 비상 설치해 크레인으로 용선운반차에 실린 용선을 사처리장에 부어야 했다.
“9월 11일부터 30일까지 20일 동안 비상작업을 해서 9000톤이 넘는 쇳물을 모래 위에 부으며 제강공정이 복구되기 전까지 고로의 숨통을 틀 수 있었습니다. 불행한 사태였지만, 모두가 힘을 모아 아이디어를 내서 어떻게든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끝내 위기를 극복해 내는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포스코의 저력이 아닐까 합니다.”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냐고 묻자, 김수학 명장은 후배 대신 선배 세대에게 ‘숙제’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포스코의 선배들은 후배들을 인정하면서 포스코의 목표를 이루어나갈 방법, 즉 변화를 받아들이고 후배 세대의 사고를 수용하면서도 좋은 전통은 이어가야 하는 숙제가 있다고 말했다. 바꾸려고만 하지 말고 변화하는 세상에 바뀔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야 미래의 주축이 될 후배들이 포스코를 백 년 기업을 넘어 영속기업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그리고 나서야 그는 후배들에 거는 기대감을 말했다.
“저는 평소에 젊은 후배들에게 주인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했는데, 어쩌면 이번 사태는 주인의식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집에 불이 났을 때 ‘도망가는 사람은 손님이고 불을 끄러 달려드는 사람은 주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불을 끄러 달려드는 사람만 많이 보았지, 도망가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은 늘 젊은 세대가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이고 개성이 강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개성과 특징이 ‘주인의식’에 반하지는 않더군요. 이번에 포스코의 젊은 세대들이 보여준 모습만 봐도 그렇죠. 선배든 후배든 모두가 위기에 한마음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면, 포스코가 영속기업으로 성장해나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의 마음으로 주인을 알아보는 김수학 명장, 그에게서 쇳물의 열기를 닮은 뜨거운 열정을 느꼈다. 앞으로도 그는 평생 고로에서 쌓은 기술과 경험을 전파하며 백 년 기업 포스코의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이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4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신승철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
7편 : 포항제철소 후판부 이영춘 명장
8편 : 광양제철소 화성부 김제성 명장
9편 :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 명장
10편 : 포항제철소 제강설비부 남태규 명장
11편 : 광양제철소 제선부 배동석 명장
12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명장
13편 : 저탄소공정연구소 한병하 명장
14편 : 광양제철소 압연설비부 김종익 명장
15편 : 광양제철소 도금부 손병근 명장
16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손광호 명장
17편 : 광양제철소 열연부 김용훈 명장
18편 : 포항제철소 STS제강부 김공영 명장
19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정규점 명장
20편 : 포항제철소 제강부 오창석 명장
21편 : 포항제철소 설비기술부 이정호 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