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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㉓] 무결점 취련 36년, 전로 출강작업 자동화하다

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㉓

[포스코명장 특별 인터뷰㉓] 무결점 취련 36년, 전로 출강작업 자동화하다

2024/12/10

포스코 현장 기술인 최고의 영예이자 롤모델인 포스코명장(名匠).
숨 가쁘게 흘러가는 명장의 일상에서 투철한 직업관과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하기까지,
명장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은 예전에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박제된 표현 같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 이영진 명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박제된 표현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그가 살아온 삶에는 짜릿한 ‘스토리’가 있다. 개천에서 난 용, 이영진 명장을 만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두메산골로 버스는커녕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던 영월군 김삿갓면이었다. 외진 산골이었지만 그의 집은 제법 단란한 가정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는. 어려운 경제 형편에 당장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가 되자, 담임 선생님의 조언이 이영진 명장을 포스코로 이끌었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포스코에서 설립한 포철공고에 진학하면 우선 학비가 무료이고 기숙사도 제공된다는 것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이영진 명장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포항제철에 입사할 기회도 있다고 하니, ‘바로 이거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포항으로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먼 데까지 가서 혼자 공부할 수 있겠냐”며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눈에 밟혔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환경에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름 강단이 있다고 자부했던 그의 마음도 크게 흔들렸다. 실제로 포항에 내려온 뒤, 처음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때마다 그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영진 명장은 포철공고 제강과에서 수학하고, 1987년 4월 포스코에 입사했다.


눈을 돌려 어디를 보아도, 무엇을 보아도 다 도전일 수밖에 없는 어려운 환경 때문이었을까. 이영진 명장은 도전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고 또 한편으로는 즐기기까지 했다. 그가 포스코에 입사해서 발령을 받은 곳은 포항제철소 2제강공장 전로반이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정말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전로반에서 일하면 취련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취련사는 작업자에게 의존하는 속인성 작업을 주로 하고, 고열에 분진까지 많은 거친 작업환경에서 일해야 했다. 전로에서의 고된 작업은 취련사가 안고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취련은 생산과 품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업무로, 작업자의 부담감 또한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전로반에 남아서 계속 근무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열에 한 둘조차 꼽기 어려웠고, 신입사원이라면 거의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기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진 명장은 이곳에서 일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취련 조업기술이 낙후한 때였기에 ‘성분격외’, 즉 정해진 성분 범위를 벗어나는 일종의 ‘불량품’이 자주 발생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당연히 일과 후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품질불량이 난 원인을 찾아내고 거기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는 품질검토회를 열곤 했다. 이영진 명장은 이런 노력에 적극 동참하는 것은 물론 성분격외 문제를 제대로 알고자 개인적으로 금속에 대한 이론도 공부했다.


이렇게 노력한 끝에 그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취련사로 손꼽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항상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앞서 작업한 취련사의 작업내용을 정밀분석하고, 취련에 들어가면 작업에만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이영진 명장은 취련사로서 2제강공장에서 항상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2001년 7월에는 무결함 500차지(charge)란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500번이나 취련작업을 하면서 한 번도 결함을 내지 않았다는 뜻인데, 지금에야 더 좋은 기록들도 많지만 당시로선 입이 떡 벌어지는 대단한 기록이었다. 2004년 6월에는 무결함 취련 700차지까지 달성하면서 ‘기록 제조기’란 별명도 생겼다.

취련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웬만한 베테랑 취련사도 1~2개월에 한 번쯤은 크고 작은 실수를 하는 법인데, 이런 놀라운 대기록을 한 사람이 계속 쏟아내려면 남다른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영진 명장의 남다른 노력은 크고 작은 수상으로도 이어져 포항제철소장 등의 각종 상을 수차례 받았다. 2005년에 올해의 제강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2006년에 우수 취련사로 선정됐다.

그래서일까, 이영진 명장은 취련사와 전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특수 직종인 취련사가 제철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한다고 말했다. 수백 종에 이르는 철강제품의 성질이 취련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고로에서 막 나온 쇳물은 불순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강도가 약한 철(iron)이 된다. 이를 강도가 강한 강(steel)로 만드는 것이 취련인데, 이 작업이 바로 거대한 용기인 ‘전로’에서 이뤄진다.

“취련사들은 불꽃 색깔만 보고도 섭씨 1600∼1700℃에 이르는 온도를 정확히 읽어내야 합니다. 제가 작업했던 전로는 높이 12미터로, 처리용량이 300톤 규모의 거대한 설비입니다. 포항제철소 철강제품의 78%가 이곳을 거치죠. 취련공정이 특히 중요한 까닭은 산소 취입량과 작업시간 등에 따라 제품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취련 작업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총 45~50분이며, 이 중 산소취입 등 핵심작업 시간은 17∼19분이다. 특히 준비시간 5분 동안엔 초를 다투면서 각종 작업조건을 치밀하게 결정해야 한다. 작업에 들어가서는 쇳물의 빛깔, 소리, 온도, 불꽃 모습, 흐르는 모습 등을 보고 산소 취입량과 시간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때 고려해야 할 요소만도 무려 70여 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제철소에선 생산직 중 유일하게 취련 작업자에 한해 ‘사’ 자를 붙여 ‘취련사’로 격을 높여 부르죠.” 그의 웃음 섞인 말에서 취련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2제강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영진 명장은 입사 23년 차가 되던 때, ‘맨땅에 헤딩’하는 고된 일에 뛰어든다. 눈 감고도 일할 수 있을 정도로 2제강공장에 익숙해진 시기, 편안함과 익숙함을 뿌리치고 3제강공장 신설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이다. 주변에서는 다들 ‘왜 사서 고생을 하냐’라며 만류했다.



“신설공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힘들지만 얻는 것도 많습니다. 사실 조업하는 사람이 이런 프로젝트가 아니면 설비를 계획하는 근본적인 일을 경험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설비를 들여와서 놓고, 설비의 새로운 특성에 따라 각종 표준을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하면서 고생을 넘어서는 소득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었죠.”

도전에 후회는 없었지만, 3제강공장 신설 프로젝트는 그 어떤 업무보다 고되고 어려웠다. 거대한 설비와 공장을 다 지어놓고 시운전을 할 때가 다가오자 걱정도 함께 찾아왔다고. ‘어디에 내가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어서 시운전할 때 그 문제가 터져 나오기라도 한다면…’하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결국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기고 눈썹이 빠지는 지경까지 갔다. 3제강공장 신설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또 있다.

“공장은 준공이 됐는데, 국방부에서 3제강공장 높이가 높아서 포항공항에 비행기 착륙이 어렵다고 고도제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장가동을 못하고 스탠바이 상태로 3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때 포항시민들이 포스코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꼈습니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작은 트러블도 있고, 불만도 표시했던 포항시민들이 나서서 떡을 해서 나눠주고 응원해 주면서 공장 가동에 대해 목소리를 내줬습니다. 그 덕분이었을까요?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어서 지금은 공장이 씽씽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포항시민들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렇게 한결같이 포스코를 지지해 주신답니다.”


이영진 명장의 도전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특히 그의 성과 중 눈에 띄는 것이 중 300톤 전로 캐치 카본법(Catch Carbon法)이다.

“‘취련’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고로에서 넘어온 쇳물, 즉 용선에 산소를 불어넣어 여러 가지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산소를 불어넣으면 산소 즉, ‘O’가 용선에 있는 탄소 ‘C’와 만나서 일산화탄소 ‘CO’가 나오죠. 이 과정을 탄소를 빼낸다고 해서 ‘탈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통상 4.3% 정도 되는 탄소를 0.04% 수준으로 줄입니다. 그런데 취련과정에서 줄이는 게 탄소만은 아닙니다. 함께 줄여야 하고, 또 줄이는 게 바로 인(P)인데, 인은 1200여PPM 수준에서 150PPM 수준으로 줄입니다.”

문제는 이영진 명장이 일하는 곳이 3제강공장이라는 점이다. 3제강공장은 다른 제강공장과는 달리 타이어코드강, 엔진밸브강, 베어링강 등을 만들어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강을 만들려면 취련 과정에서 탄소를 더 많이 남겨야 하는데, 0.04%보다 높은 0.8%가 적정 수준이다. 문제는 탄소는 더 많이 남기되, 인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보통 탈탄 과정에서 0.04%까지 탄소를 낮추면 나중에 다시 탄소를 보충합니다. 그런데 이때 탄소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불순물도 함께 첨가되죠.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탄소를 원하는 수준인 0.8% 수준으로 맞추고 들어가면서 인은 150PPM 수준으로 잡아주는 게 이상적입니다.”

이영진 명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러브스토리라고 알려진 일화를 읽고 힌트를 하나 얻었다. 한 여인이 갈증이 심한 나그네에게 물 한 바가지를 건네주면서 버드나무 잎 하나를 살짝 띄웠다는 에피소드였다. 물을 마시면서 나뭇잎도 함께 들이킬 수는 없으니 천천히 물을 마시도록 만드는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이영진 명장은 이와 마찬가지로, 취련 시간을 연장해 산소를 적당량 천천히 주입하며 취련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물론 말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고, 산소의 적당량, 취련의 최적시간 등을 잡아내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가 개발한 이 방법은 기존의 작은 전로, 즉 100톤 전로에서는 이미 적용해온 방식이었지만, 3제강공장의 전로와 같이 300톤 규모의 큰 전로에서는 당시까지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이 방식이 성공하자 ‘세계 최초’이며, ‘현재로선 세계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의 성과 중에는 작업자들이 박수갈채를 보낸 기술도 있다. 작업자 입장에서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전로 출강작업 자동화 기술이다.

“제강공정에서 작업자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전로에 담긴 용강을 래들에 옮겨 담을 때입니다.”

전로에서 탈탄 등을 완료하면 전로를 기울여서 전로에 담겨있는 쇳물, 즉 ‘용강’을 래들이라는 용기에 옮겨 담아야 한다. 취련사는 용강이 래들에 담기는 순간 필요한 합금을 첨가하는 등의 작업을 하고, 운전자는 전로를 기울여 용강을 붓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컵에 따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전로와 래들을 움직이는 일은 그 난이도가 하늘과 땅 차이다.

“용강을 래들에 부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용강 윗부분에 떠다니는 불순물 찌꺼기인 ‘슬래그’입니다. 전로를 기울여 용강을 래들에 옮겨부으면 슬래그도 같이 래들로 넘어갈 수 있는데, 절대 그래서는 안됩니다.”

자칫 이 과정에서 용강이 비산되거나 유출되기라도 하면 그건 초대형사고다. 제철소에서 조업관련 사고 중 최악의 사고가 대다수 제강공정에서 용선이나 용강을 누출하는 사고다. 포스코 역시 과거를 되짚어 올라가 보면 ‘제강사고’(1977.4.24)라고 불리는 대형사고의 역사가 있다. 이를 모르는 이가 없기에 모든 작업자에게 이 일은 그야말로 진땀을 빼는 작업이다.

“이렇게 섬세하고 위험하며 중요한 작업을 수작업에만 의존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이 작업을 자동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자동화가 어려운 작업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여태껏 자동화가 안된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죠. 게다가 내포된 위험성이 커서 자동화 추진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끈기 있게 매달려 결국 자동화에 성공했습니다.”

어려운 작업이었던 만큼 성공하고 나서 기쁨도 컸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뿌듯했던 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작업자에 따라 품질 편차가 날 수밖에 없었던 전로 출강작업을 자동화해서 품질 편차가 없는 작업으로 바꿨다는 점, 둘째로 전로운전 작업자의 안전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용강을 래들이라는 일종의 그릇으로 옮겨 담는 모습은 ‘제철소’ 그 자체다. 과거 언론에서 제철소를 촬영하면 고로에서 출선하는 장면을 찍기도 했는데, 지금은 용선이 나오는 과정은 다 설비에 가려져있으니 가장 제철소다운 모습이라고 하면 보통 전로의 취련작업을 떠올린다. 산소를 불어넣을 때 때론 붉은 쇳물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여기저기로 튀는 모습은 마치 화려한 그림 같다. 하지만 작업자의 입장에서 ‘불꽃이 튄다’는 것, ‘용선이 끓어넘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철광석이 고품위일 때는 용선 속에 실리콘(Si)이 적습니다. 그런데 품위가 떨어지는 철광석을 사용하면 실리콘 함량이 높아집니다. 또 지난해 냉천 범람 사고 당시에 제강에서 고로의 용선을 제때 받아주지 못하다 보니 고로운전을 의도적으로 천천히 해야 했는데요. 이런 경우에도 고로에서 나온 용선에 실리콘 함량이 높아집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저희 제강공정에서 이 실리콘을 잡아 줘야 하죠.”



그렇다면 실리콘 함량을 조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석회와 같은 부원료와 산소를 많이 불어넣어 주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취련 과정에서 쇳물이 폭발하듯이 튀면서 넘쳐흐르는 일이 생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제가 고안한 해결책은 공정을 둘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산소를 불어넣는 과정에서 쇳물이 넘쳐흐르게 되니까, 우선 이 탈탄 과정을 뒤로 미루고 실리콘을 먼저 없애고, 그 함량이 안정되고 나면 그때 정상적인 산소 취련으로 탈탄을 하는 거죠.”

이 해결책은 전로작업에 획기적인 공정혁신을 가져왔는데, 특히 지난해 냉천 범람 사고 당시 진가를 보여줬다. 제강공정에서 제선공정에서 생산한 쇳물을 다 받아주지 못하면 결국 정상적인 조업을 해내지 못하고 실리콘과 인 성분이 매우 높은 용선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데, 그가 참여해 개발한 이 ‘하이 실리콘 (High Silicon) 용선 처리 기술’이 뒷심을 발휘했다.

명장들은 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고유한 특징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공부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기록을 좋아한다. 물론 하나의 특성으로 명장을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명장마다 나름의 특징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영진 명장 역시 많은 장점과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그를 명장의 반열까지 끌어올린 고유한 특징은 바로 부드럽고 끈기 있는 소통능력이 아닐까. 그의 러브스토리와 선후배 관계에서도 이런 특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청년 이영진은 친구들과 함께 나간 미팅 자리에서 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다고 한다. 서로 소지품을 내놓고 골라서 파트너를 정하는 정말 예스러운 방식으로 마음에 드는 여성과 짝이 됐다. 그는 다시 한번 만남을 청하고 수락을 받았는데, 문제는 다음 약속 장소에서 그 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 어려우니 약속은 해놓고 나타나지 않는 방식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보통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포기했을 텐데, 이영진 명장은 그러지 않았다. 주선자에게 부탁해 다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닫힌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 여성은 다음 약속장소에 등장했고, 현재는 이영진 명장의 사랑하는 아내가 돼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가고 있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배려하며 설득하는 그의 이런 부드러운 소통 능력은 후배들에게도 아낌없이 발휘된다. 진정한 선배는 후배들의 ‘길잡이’가 돼주는 선배라고 말하는 이영진 명장. 그는 2030세대 후배들과 제대로 소통하려면 그들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믿고, 그 구체적 방법론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단다. 자신이 이룬 것을 전수하는 것도 중요하고 축적한 노하우를 활용해 새로운 실적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선후배가 함께 만들어내는 ‘조직의 힘’을 믿는 그는 후배들에게 그가 체험했던 ‘성공경험’을 전해주려 노력하고 있다.

어려운 도전에도 좌절하지 않고 까다로운 일일수록 완벽하게 해내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혁신을 만들어온 이영진 명장. 36년 무결점 취련사로서의 자부심을 넘어서 명장의 책임감으로 묵묵히 자신만의 신기록을 써가고 있다.

[포스코의길, 명장의道] 포스코명장 특별인터뷰 모아보기
1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손병락 명장
2편 : 광양제철소 제강부 조길동 명장
3편 : 포항제철소 열연부 권영국 명장
4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신승철 명장
5편 : 포항제철소 제선설비부 김차진 명장
6편 : 광양제철소 EIC기술부 김성남 명장
7편 : 포항제철소 후판부 이영춘 명장
8편 : 광양제철소 화성부 김제성 명장
9편 : 포항제철소 압연설비부 서광일 명장
10편 : 포항제철소 제강설비부 남태규 명장
11편 : 광양제철소 제선부 배동석 명장
12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이경재 명장
13편 : 저탄소공정연구소 한병하 명장
14편 : 광양제철소 압연설비부 김종익 명장
15편 : 광양제철소 도금부 손병근 명장
16편 : 광양제철소 냉연부 손광호 명장
17편 : 광양제철소 열연부 김용훈 명장
18편 : 포항제철소 STS제강부 김공영 명장
19편 : 포항제철소 EIC기술부 정규점 명장
20편 : 포항제철소 제강부 오창석 명장
21편 : 포항제철소 설비기술부 이정호 명장
22편 : 포항제철소 제선부 김수학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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