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술방
‘메스’를 건네는 권 간호사의 손길이 평소보다 묵직하다. 10년도 넘게 해온 일이지만, 이번엔 수술대 위에 아버지가 누워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응급 개두술에 처음 스크럽(간호사가 수술에 참여해 의사의 수술을 돕는 일)을 설 때보다 더 떨렸지만, 수술 도구가 투입될 순서를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되뇌었다. 아버지의 머리가 매끈하게 면도 된 모습은 그녀에게도 낯설었지만, 자신의 두상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머리에 물음표 모양으로 그려진 보랏빛 선(칼로 절개할 부위를 보라색 물감으로 미리 그려 놓는다)을 따라 메스가 매끈하게 살을 잘라 나가면서 붉은 피가 나온다. ‘보비 팁’(지혈 전기 도구)을 들고 있던 레지던트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두피를 목표대로 열고 ‘리트랙터(retractor)’로 시야를 확보하고 나면 수술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뇌지주막하 출혈(뇌 동맥에 있던 꽈리모양의 혈관 풍선이 터져 출혈을 일으키는 병으로 뇌출혈 중 예후가 가장 나쁘다)로 뇌가 심하게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뇌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넘어서면 수술은 무의미해진다. ‘드릴’로 키홀(key hole)에 구멍을 뚫고 ‘전기톱(saw)’으로 두개골을 절단한 후 열어 놓자, 뇌막 안으로 대뇌가 부풀어 오른다. 권 간호사는 뇌막을 전개할 ‘정밀 가위’와 뇌혈관 꽈리가 있는 곳까지 뇌를 절개하는 데 필요한 ‘바이폴라(bipolar)’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핏줄기가 수술방 천정까지 치솟는다. 상처가 난 곳에 딱지(가피)가 생기듯 터진 뇌혈관에도 딱지가 붙어 출혈을 일시적으로 막아준다. 하지만, 살짝 붙어있는 것이라 결국 떨어지는데, 이것이 떨어지기 전에 수술을 마쳐야 한다. 수술 도중에 떨어지면 펌프에서 퍼 올려지는 것처럼 피가 강하게 솟구친다. 지혈이 안 될 경우 2-3분 내에 심정지가 올 수 있다. 초응급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마취과 선생님, 피가 좀 납니다. 혈압 금방 떨어질 겁니다. 서둘러 주세요!”
“혈액 다섯 파인츠 더 달겠습니다만 빨리 (출혈 부위를) 잡아주셔야 합니다!”
신경외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 사이에 격앙된 문장이 오간 뒤 집도의는 피가 치솟는 수술 필드로 다시 고개를 들이밀며 소리친다.
“10 mm, 라이트 앵글(right angle)!”
권 간호사는 뇌동맥류를 묶을 수 있는 여러 클립 중 오른쪽으로 각이 이루어져 있는(right angle) ‘클립'(clip, 터진 뇌동맥류 아랫부분(neck)이 잘 결찰될 경우, 터진 동맥류 부위로 피가 샐 위험성이 영구적으로 사라진다)을 골라 재빠르게 ‘어플라이어’(applier, 클립을 집는 집게로 뇌 깊숙한 곳에 클립을 넣는데 사용한다)에 물린 후 집도의가 바로잡을 수 있도록 적당한 압력으로 주치의 손에 건넨다. 수술의 성패가 달려있어서 보통은 신중하게 진행하는 절차지만 피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다. 많은 경험을 통해 다져진 동물적 감각으로 클립의 크기와 각도를 선택했다. ‘석션(suction)’으로 수술 시야를 깨끗하게 해보려 하지만, 온통 핏빛이다. 어디가 신경이고 무엇이 혈관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피가 송송 치솟는 뇌동맥류 목(neck)을 향해 클립을 전진시킨다.
‘쨍그랑’ 수술 방바닥으로 쇠 떨어지는 소리가 맑게 났다. 혹시 몰라 준비하고 있던 레프트 앵글(left angle) 클립이 권 간호사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간절한 침묵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 모든 힘이 빠져나갔던 모양이다. 터진 동맥류의 출혈 부위가 단 한 번의 기회에 잡힌 것이다. 권 간호사 마스크 사이로 큰 숨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 아버지의 혈압도 다시 정상으로 회복됐다.
최선을 다한 수술방의 노고일지라도 늘 희극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더 잘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진행한 수술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오히려 더 흔하다. 의대 동기의 친할아버지, 그리고 병원장의 절친 손자도 의료진의 과도한 긴장감으로 수술이 실패했던 경우를 나는 목도했다. VIP 신드롬이라고 하는데, 이걸 아는 VIP들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사례도 있다.
내 기억 속에 얼마 되지 않는 VIP의 수술 방 희극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 희극에 몇 개의 써지컬 스틸(surgical steel)이 등장하는지 세어보았다. 메스, 보비 팁, 리트랙터, 드릴, 전기톱, 정밀 가위, 바이폴라, 클립, 어플라이어, 석션 등 병원 수술방 희극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장면들 중 써지컬 스틸이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가위, 어플라이어, 석션 등 기본적인 수술 도구부터 작고 가늘면서도 뇌동맥류를 영구적으로 물고 있어야 할 클립처럼 신경외과 영역 가장 정밀한 수술 도구까지 모두 써지컬 스틸로 만들어졌다.
써지컬 스틸의 활약은 비단 신경외과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심장 혈관이 막혀 생사의 문턱에 있는 심근경색 환자를 심장 직접 여는 흉부외과 수술 대신 다리나 팔의 동맥으로 심장까지 다다른 후 막힌 혈관에 인공 파이프를 설치해 피를 영구적으로 흐르게 하는 스탠트(stent)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써지컬 스틸 덕분이다.
정형외과 영역에서는 훨씬 일찍 써지컬 스틸이 사용돼 왔다. 다 닳아서 기능을 못하면서 통증을 일으키는 무릎이나 대퇴골 관절을 대치하는 인공 관절과, 흔들리는 척추뼈를 단단하게 고정해주는 허리 수술에 사용되는 스크류(screw)도 역시 써지컬 스틸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써지컬 스틸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는 도구며 이를 소독하는 도구들도 대부분 써지컬 스틸이 원료이다. 써지컬 스틸은 현대의학의 역사라고 할 만큼 병원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2. 우연
2000년대 초반 배아줄기세포 개발을 위해 세계 생물학자들이 분초를 다투고 있을 때였다. 학문적 성과는 물론 덤으로 노벨상까지 거머쥘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도전 과제에 내로라하는 전 세계 천재 연구팀들이 달려들었지만 성공했다는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천 가지 경우의 수를 오차 없이 줄여나가야 하는데 당시 기술로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식세포에 자기장을 노출시키는 절차만 해도 어떤 강도로 얼마 동안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려면 수백 종류의 시나리오를 돌려봐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변수를 통제하지 못하면 실험값은 오히려 혼란변수가 될 뿐이다.
그러던 중 국내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했다며 세계 최고 저널에 발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배양한 배아줄기세포 라인의 실체와 성공 비결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공개한 방법대로 다른 연구팀이 따라 해봤더니 배양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국내 연구팀 또한 재현하는데 실패했다. 실체는 있는데 성공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배아줄기세포는 적어도 12종류가 있어야 효용성이 높아지는데, 방법을 모를 경우 다른 11가지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때문에 세계 학계는 국내 성과를 우연이라며 기술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국내 연구팀 또한 10여 년이 지났지만 다른 종류의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논문 조작이라는 민망한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연이 꼭 필연이 되지는 않는가 보다.
1913년, 1차 세계 대전 중 전쟁터마다 예상치 못했던 골칫거리가 군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르게 대포와 총에 녹이 슬어 오작동이 많아진 것이다. 무기에 기름칠하며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이 평상시와는 달리 실전에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각국의 최고 과학자들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녹슬지 않는 금속을 개발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하고 있었다. 영국 세필드 지역의 한 철강 연구소에서 일하던 해리 브리얼리(Harry Brearley)도 부식되지 않는 총구를 개발하기 위한 실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철과 크롬의 적당한 비율을 찾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꾀나 실패를 거듭하고, 정답이 있는 문제인지에 대한 회의가 들던 그 순간 크롬 12.8%라는 보석 같은 비율이 다가왔다. 그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국내 배아줄기세포와 달리 그가 찾아낸 녹슬지 않는 철의 비법은 다른 사람이 재현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우연이 다 같은 것은 아닌가 보다. 써지컬 스틸의 우연은 필연이 됐으니까. 이후 니켈, 망간, 몰리브덴 등의 금속이 첨가되어 기능이 향상된 녹슬지 않는, 써지컬 스틸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었다.
3. 초소형 로봇이 될지어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외계인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뛰어난 상상력이 녹아 있어 보는 재미를 준다. 그중에서도 ‘우주 수술’을 묘사한 장면은 압권이다.
우주의 별을 탐험하다가 몸에 이상을 느낀 주인공은 우주선에 마련된 캡슐 안으로 들어가 눕는다. 버튼을 누르자 캡슐 덮개에 있던 첨단 진단 장치가 몸을 스캔하더니, 비정상적인 부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수술대가 마련되고 로봇 팔이 나타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상 부위를 말끔히 제거한다. 인공 지능을 장착한 로봇이 지금의 MRI, CT, 초음파를 합친 것보다 뛰어난 진단 도구로 인간 의사 없이 질병을 치료한다는 설정에 전율이 돋았다. 멀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공 지능 로봇의 팔은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요즘 아이들이 ‘어벤져스’ 보듯 했던 필자 학창시절의 영화 ‘로보캅’에서 미래의 로봇 경찰로 등장했던 머피의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 팔과 같은 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1987년 그리고 2012년, 25년의 차이를 두고 개봉한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재료라면 그것은 써지컬 스틸일 것이다. 100년 전에 개발된 것이지만 현재에도 맹활약을 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재료가 바로 써지컬 스틸이니까 말이다.
이는 다른 분야의 발전과 잘 융합될 수 있는 써지컬 스틸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3D 프린터 기술과 융합되면서 써지컬 스틸은 개인 맞춤형 의료 도구 시대를 열고 있다. 기성복처럼 이미 설정된 규격과 모양대로 만들어진 인공 무릎 관절 제품보다 3D 프린터로 개인에게 맞춰진 제품은 기능이 더 좋을 뿐만 아니라 무릎 인공 관절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고 있는 짧은 수명(10-15년)을 극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공 관절뿐만 아니라 치과의 보철 도구, 두개골 결손 환자를 위한 인공 뼈, 그리고 인공 디스크에도 3D 프린터와 융합된 써지컬 스틸이 활용되고 있고, 그 범위는 가파른 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특히 크기가 작아도 강하며 체내에서 오래 견딜 수 있는 특징은 써지컬 스틸의 미래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인공지능의 핵심부품인 인공신경(artificial neuron)을 아주 작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지만, 곧 가능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올해 미국 MIT 공대 김지환 교수 연구팀은 인공신경 핵심 기술인 초소형 트랜지스터 개발에 성공했다. 인공신경이 써지컬 스틸로 만들어진 작고 강한 운반체(vehicle)에 장착된다면, 혈관을 돌아다니며 온 몸을 구석구석 카메라에 담는 일은 당장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로봇에 막힌 혈관을 바로 뚫어버리는 역시 써지컬 스틸로 만들어진 스텐트(stent)를 담아낸다면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뇌혈관이나 심장 혈관이 막혔더라도 큰 수술을 받는 대신 혈관을 돌아다니는 소형 로봇을 주사 맞든 혈관에 맞으면 어디가 막혔는지 정확하게 진단을 받는 동시에 치료를 받게 될 테니까 말이다.
암 치료에는 더 괄목할만한 진화가 나타날 것이다. 작은 로봇이 항암제를 싣고 암 덩어리에 직접 들어갈 수 있다면 정상세포까지 사멸하느라 겪어야 했던 항암제의 온갖 합병증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열에 약한 암세포의 약점을 열전도율이 높은 써지컬 스틸의 장점과 맞물리게 한다면 항암제를 대신할 새로운 암 치료법을 써지컬 스틸이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미래는 써지컬 스틸이 더 작고 강하면서 컨트롤이 쉬워진다면 더 빨리 올 것으로 전망되는데 최근 나노과학이 써지컬 스틸에 접목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써지컬 스틸이여, 제발 초소형 로봇이 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