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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름 김차진 포스코명장] 고로정비 외길 40년··· 설비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답한다

[위대한 이름 김차진 포스코명장] 고로정비 외길 40년··· 설비는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답한다

2016/06/30

김차진 명장은 포항제철소 제선부 직원에게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포스코명장이 되기 전에 이미 모두의 마음 속 명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코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고로정비 기술력을 갖고 있는 김차진 명장. 그는 4고로 스테이브(stave) 교체, 고로 철피 교체 등 독보적인 고로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고로 관련자들도 "김 명장을 능가하는 열정을 갖고 노력하는 기술자는 드물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럼에도 김차진 명장은 고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해결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기면 끝까지 남아 문제를 물고 늘어져 결국에는 해결하고야 만다. 업무에 열정적인 나머지 주위에서 오히려 건강을 챙기라고 걱정할 정도다.

포스코가 6월 16일 현장 기술인 최고의 영예인 2016 포스코명장(名匠)을 선발하고 임명패를 수여했다.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현장의 창의적 개선활동과 회사 경쟁력 향상에 기여하는 포스코명장 3인을 차례로 만나보자.

 

 

[김차진 명장은…]

 

김차진 명장은 포항제철소 제선부 직원에게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는 포스코명장이 되기 전에 이미 모두의 마음 속 명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코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고로정비 기술력을 갖고 있는 김차진 명장. 그는 4고로 스테이브(stave) 교체, 고로 철피 교체 등 독보적인 고로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고로 관련자들도 "김 명장을 능가하는 열정을 갖고 노력하는 기술자는 드물다"고 혀를 내두른다.

 

그럼에도 김차진 명장은 고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해결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기면 끝까지 남아 문제를 물고 늘어져 결국에는 해결하고야 만다. 업무에 열정적인 나머지 주위에서 오히려 건강을 챙기라고 걱정할 정도다.

 

열정적인 탐구자세를 갖춘 그는 3세대 광폭냉각반 취외방법 개선 방안을 비롯한 제안 13건, 스테이브 쿨러(stave cooler) 고로 내부 전 둘레(360°) 이동장치 등 특허 및 노하우 8건을 보유하고 있다. 2015년 철의 날에는 철강기능상을 받아 대내·외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기술인이면서 훌륭한 멘토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업무에 임하고, 항상 동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저근속 직원들에게 직무 노하우를 전수하고 멘토링 활동을 펼치는 데도 아낌이 없다.

 

1976년 입사해 보리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쌀밥을 먹고, 생전 처음 누워보는 침대 위에서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빌었던 18세 소년은 이제 포스코명장이 되어 세계 최고의 기술인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간다.

 

 

급식 빵으로 허기 채운 가난한 시골소년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김차진 명장은 기름때 찌든 장갑을 벗으며 "현장에 다녀오느라 조금 늦었다"며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데, 그의 얼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을 이기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선량한 인상과 더불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끝까지 파고들고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꼬장꼬장하고 고집스러운 장인의 인상이었다. 그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고는 경북 경주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이야기부터 들려줬다.

 

1958년에 태어난 김차진 명장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생일이 빠른 것도 아니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히 조숙하지도 않았던 그를 1년 일찍 학교에 입학시킨 것은 당시 초등학교에서 지급하는 옥수수빵 급식이라도 먹이려는 부모의 각별한 마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열아홉 살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철공소에서 기술을 배워 제법 인정 받는 도금기술자로 일하셨어요. 그러다가 태평양전쟁 막바지 해방 직전에 빈손으로 귀국하셨죠. 가족들 몰래 땅 팔아서 일본에 갔다가 빈털터리로 귀국한 아버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결국 큰아버지 땅이나 남의 집 땅을 빌려 소작농사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술을 배웠던 아버지가 농사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어머니가 참 많이 고생하셨어요. 싸락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저 눈이 다 쌀이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는 방학이면 날마다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했다. 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초가삼간보다도 소년 김차진이 쌓은 나뭇짐 무더기가 더 높았다. 어머니의 탄식 어린 푸념은 그의 뇌리에 박혀 평생 지워지지 않고 남아 매사 끊임없이 묵묵히 노력하는 그의 바탕이 됐다.

 

 

두 차례 도전 끝에 ‘포스코
황색 제복’을 입다

 

풍족하지 못했던 유년 시절은 그의 삶을 ‘특별한 길’로 끌고 가게 만든 뚜렷한 동기가 됐다. 낮에는 힘든 노동을 하고 밤에는 호롱불 아래에서 숙제를 했다. 그 숙제는 ‘만들기’. 가난한 집의 배곯는 학생이었지만 김차진 명장은 손재주가 유달리 뛰어났다. 그가 공작 숙제를 해가면 선생님이 "네가 만든 거 맞아?" 하고 물으며 그의 작품을 교실에 진열했을 정도였다.

 

타고난 손재주를 가졌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경주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운명이었는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포스코는 2기 설비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육송으로 운반되는 기자재와 제품들이 경주와 포항의 비포장 도로를 쉴새 없이 다니는 것을 보면서 막연히 포스코를 동경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포스코의 황색 제복과 검은 워커를 신고 나타난 동네 선배가 그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다. 포스코에 입사하고야 말겠다는 꿈이었다.

 

3학년 2학기. 친구들이 다들 기업체에 실습을 나가 있는 동안 김차진 명장은 동네 산속 재실(齋室)에서 공부에 매진해 두 차례의 도전 끝에 포스코 입사 통지서를 손에 쥐었다.

 

"포스코 입사 확정 통지서를 받고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내색은 안 하셨지만 아마 부모님께서 저보다 더 기뻐하셨을 겁니다. 어머니는 뜨거운 제철공장 일이 위험한 거 아니냐면서 매사에 조심하라고 이르셨고, 아버지는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신보(しんぼう·辛抱·참고 견딤)를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죠. 두 분의 염려와 당부는 제가 40년간 흔들림 없이 고로공장 정비에 전념할 수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포스코 기술인 최고 명예인 명장 칭호를 받은 그에게도 신입사원 시절이 있었다. 그의 말머리는 1976년 3월, 신입사원 도입교육을 받으러 연수원(현 동촌생활관) 숙소에 입소하던 시간으로 돌아갔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숙소의 규모와 시설에 놀랐고, 식당에서 제공되는 흰 쌀밥과 반찬에 또 한 번 놀랐다. 보리쌀이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은 하얀 쌀밥이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누워보는 침대 위에서 꿈이 아니길 빌었다. ‘여기에 내 인생을 다 바칠 수 있다면···.’ 18세 소년은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포스코에 발을 디딘 그는 도입교육 후 입사 동기 2명과 함께 포항 2고로 건설현장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김차진에게는 안전화를 무제한 지급하라"

 

"당시 작업장(현 파트장급)께서 저희를 펌프 수리현장에 데리고 가더니 오햄머(큰 쇠망치)로 커플링(coupling)을 쳐서 끼워보라고 하셨어요. 다른 신입사원들 망치는 허공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는데 제가 한 번 치면 2~3mm씩 쑥쑥 들어가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직무가 정해졌지요. 나는 2고로 기계정비 청정설비 정비반, 다른 두 사람은 설비점검반으로요."

 

당시 점검반은 말 그대로 설비를 점검하고, 설비 이상 개소를 정비반에 알려주면 정비반이 그 일을 수행하는 체제로 구성돼 있었다. 점검반 요원이 행정 위주의 일이라면 정비반은 몸으로 때우는 일을 했으므로 같은 직급이라도 노동 강도에 꽤 차이가 큰 셈이었다.

 

하지만 김차진 명장은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일이 주어지면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사실 일의 강도는 시골 농사일에 단련된 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가 지게로 하던 일은 리어카가, 무거운 물건 드는 일은 체인블록이나 크레인이 대신했다. 모내기처럼 하루 종일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할 필요도 없었다. 산소절단기로 자르고, 용접해서 붙이고, 원료 호퍼(hopper) 속의 마모된 라이너(liner)를 교환하는 일들은 작업복이 좀 지저분해지는 것 외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가 업무에 얼마나 열중했는지를 느끼게 하는 에피소드 하나를 꺼냈다.

 

"요즘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안전화를 새로 받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마모 정도를 정비과장이 직접 확인하고 교체 허락을 해줘야 자재담당자가 신품을 지급해주는 시스템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 안전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마모되는 속도가 항상 빨랐어요. 어느 날 담당 작업장께서 저를 부르시더군요. ‘정비과장께서 너에게 안전화 무제한 지급 특권을 주셨으니, 안전화가 닳으면 언제든지 자재 창고에 가서 바꿔 신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어요.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안전화가 해진 것인데, 그 모습을 대견하게 봐주셔서 특혜 아닌 특혜를 받았지요."

 

만약 그 때 김차진 명장이 다른 동기들보다 고된 보직에 불평했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가 꾀를 피우면서 대충 시간을 때웠다면 또 어땠을까? 그는 어려움을 어렵게, 고된 것을 고되게 생각하기보단 ‘긍정’과 ‘정직한 최선’을 택했다. 이것이 그를 명장의 길로 이끈 것이 분명했다.

 

 

설비개선은 반복의 염증 깨는 터닝포인트

 

모두의 본보기가 되는 삶에는 고비가 늘 따르는 법이다. 김차진 명장에게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 조금씩 심적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해 추석엔 작업장이 저희 시골 집에 가정방문을 다녀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란 놈인지 보고 오라’는 정비과장의 지시가 있었다더군요. 정비반장으로 진급을 시키려고 하는데, 인사 규정상 나이가 어려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그 때였어요."

 

입사 이래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늘 똑같은 정비 업무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작업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머리 속을 떠돌아 다녔다. 일에 대한 염증은 일을 지시하는 상사를 향한 반감까지 불러왔다. 회의감이 그의 일상에 깊숙하게 자리잡으려 했다.

 

그러나 김차진 명장이 찾아낸 매너리즘의 돌파구는 남달랐다. 그는 오히려 설비 개선의지를 다지고 본격적으로 개선활동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제 위치에서 결정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부대설비인 주선기(鑄銑機) 개선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주선기는 몰드(mould)에 쇳물을 부어서 형선을 만들어 주물용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설비로, 형선이 이동하다가 낙하하지 않도록 안전격자 장치가 환봉(丸棒)으로 설치돼 있습니다. 이 장치가 열 변형으로 엿가락처럼 휘어지면서 기능을 잃으면 그 부분을 교체하는데, 사흘이 멀다 하고 교체작업을 해야 했어요. 형상적으로 동일 단면적에서 둥근바(round bar)보다 사각 바가 강도가 20배 높다는 점에 착안해서 환봉을 사각 바로 개조하고, 키트화해서 교체하기 쉽게 개선했어요. 그리고 3개월여의 효과 검증을 하면서 제안을 등록했죠."

 

노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1987년 당시 엄격한 실사와 발표대회를 거쳐 그의 주선기 개선활동은 당시 부대설비에서는 드물게 4등급 우수제안에 채택됐다. 김차진 명장에게 이 개선활동은 회사생활의 큰 터닝포인트였다. 설비개선 공로 덕분에 그 해 어머니와 장모, 부인과 함께 백암 온천으로 유공자 특별 휴양까지 다녀와 자랑스러운 아들, 사위, 또 남편이 됐다고 회고했다.

 

 

문제의 해결방법은 설비 안에 있다

 

설비 개선활동 과정에서 보람을 느낀 김차진 명장은 그 즈음부터 자신만의 성과에서 아닌 구성원 전체의 긍지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로 조직적인 개선활동에 들어갔다. 그 산출물은 지금도 1고로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공기 모바일 보스(mobile boss)다. 당시 반장이던 김차진 명장은 설비 담당자와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발생하는 야간 돌발사고를 시급하게 개선해야겠다고 공감하고 수행역할을 분담해 개선활동에 주력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12년이 지나도 건재한 현재의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돌발사고 발생 횟수는 월 20회 이상에서 1건 이하로 획기적으로 줄었고, 업무 스트레스 경감 등 작업 효과가 검증돼 우수제안 3등급에 등록되고, 특허 A등급을 출원했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부부 동반으로 백암 수련관에서 즐거운 조직활성화 시간도 만끽할 수 있었다. 탄력이 붙은 제안활동과 특허 연계는 그 후로도 이어져 2002~2006년 사이 우수제안 3등급 이상 5건 등록, 특허 5건 연계라는 쾌거를 가져왔다. 그렇게 명장으로서의 커리어가 시나브로 다져졌다.

 

물론 그의 개선활동엔 시련과 실패도 있었다. 3고로 노체 냉각기능을 회복시키려면 보조 냉각반을 대량 설치해야 했다. 24시간 계획 수량 목표치는 60개. 그러나 실적은 4개에 그쳤다. 고로 철피를 관통한 코어 비트(core bit)가 내부 스테이브(stave)의 동판에서 전진을 멈춰 버려 작업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 것이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처참한 실패였다. 고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접근한 경솔함에 김차진 명장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물론 이 실패를 디딤돌 삼아 당시 고로정비과장을 선두로 전 과원이 신(新)장비 개발을 목표로 휴일 밤낮 가리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더한 끝에 ‘노체 광폭 냉각반 최단시간 347개 설치’ ‘세계 최초 고로 철피 전 둘레(360℃) 교체’ 기록을 갱신하기에 이르렀다.

 

"개선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최고의 보람은 설비 안정이지만, 부수적인 효과는 다양한 형태로 다가와요. 설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하드웨어를 충분히 이해하려고 세밀하게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 속에서 문제의 원인이 나오고 개선방안이 떠오르죠. 개선 효과가 구체적으로 느껴질 때 그 희열은 이루 표현할 수 없어요. 특허 출원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은 사실 금전적인 보상보다도 더 짜릿하지요."

 

 

끊임없는 下心···설비가 그에게 답하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명장 김차진’이 아닌 ‘인간 김차진’이 궁금해 인생의 좌우명을 물었다. 그는 ‘하심(下心)’이라는 단어를 들려줬다. 마음을 낮추는 자세를 말한다. 남을 이기려고도, 넘어서려고도 하지 않은 겸손의 절정과도 같은 마음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수련(睡蓮) 한 송이가 있다.

 

"저는 솔직히 머리도 나쁘고, 융통성도 없어요. 잘 할 줄 아는 것도 무척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회사로부터 받는 대가에 비해 내가 회사를 위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임무가 주어지면 잠자는 시간, 노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그 일에 몰두해 순발력과 창의력을 만회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는 주어진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것이 포스코명장이라는 과분한 영광을 가져온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포스코에서 이루고 싶었던 것은 분에 넘치게 다 가졌다고 했다.

 

1990년 당시 회사에서 분양하는 가장 넓은 빌라인 포항 영일대 옆 행복아파트에 입주했고, 같은 해 또래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부의 상징인 1500CC급 승용차를 타고 시골 동네에 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으며, 어머니의 평생 소원인 자갈 논 서마지기도 사 드렸다. 행복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그의 어머니는 거실의 벽을 쓰다듬으며 "이게 우리 아들 집이가?"하시면서 여기서 평생 살라고 하셨다. 그래서 26년째 그곳에서 산다.

 

일에 빠진 나머지 가족을 잘 챙기지 못해 아쉬운 소리를 듣곤 하지만 이제는 포스코명장은 물론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명장이 되겠다면서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김차진 명장은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설비는 무생물이지만 애정을 주고, 애착을 가지고 보살피면 그에 걸맞은 화답을 합니다. 사람의 체취와 체온도 느낄 줄 알아요. 사람이 어루만져 주거나 자주 지나다니는 곳에 위치한 기계는 고장 나지 않거든요. 고로에서도 그런 현상을 자주 봐요. 통행로가 없는 방향의 설비가 트러블이 많아서 그 쪽으로 계단을 설치했더니 고장이 줄었어요.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입니다. 정비인으로서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설비는,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하심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던 김차진 명장은 이 말을 꼭 붙여달라고 했다.

 

"포스코명장이라는 자리는 제 스스로 오른 것이 아니라 주변 동료들이, 또 고로공장 설비들이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저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요. 명장이 되기 전 제 모습이 퇴색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응원하고 축하해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글·사진=권춘희 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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