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 경제 부흥을 위한 포항제철소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영일만 일대 부지 내 많은 시설이 옮겨가게 됐는데, 이 중에는 수십 년 간 가장 낮은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예수성심시녀회의 수녀원, 고아원, 양로원이 있었다. 황무지 모래펄에서 정성으로 가꾼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니…. 전쟁고아, 나환자 등 700여 명의 대가족을 돌보던 수녀원은 망연자실했지만, 제철소 설립이 가져올 조국 근대화란 의미 있는 걸음에 용단을 내렸고 20년간 가꿔온 보금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었다.
수녀원이 자진 이주를 결정하자 인근 주민들도 이주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게 전쟁과 빈곤의 상흔이 남아있던 자리에 오늘날, 제철보국을 향한 제철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포항제철소는 이러한 예수성심시녀회의 헌신에 감사와 존경을 담아 지난 5월 20일, 제철소 내 예수성심시녀회 옛터인 3고로 공장 앞에 입간판을 설치했다. 입간판에는 포항제철소에서 생산한 스테인리스 강종과 포스코 고유의 고해상도 잉크젯 프린팅 기술로 만든 포스아트(PosART)를 적용했다.
입간판이 세상에 처음 공개되던 날, 남수희 포항제철소장과 김알로이시아 예수성심시녀회원장 등관계자 70여 명이 포스코를 찾았다. 함께 제막식을 지켜본 후 포항제철소 내부를 견학하며 43년 전 수녀원의 옛터에 자리 잡은 포항제철소를 둘러봤다.
철의 날은 1973년 6월 9일 우리나라가 포항제철소의 현대식 용광로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쇳물이 흐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020년 철의 날을 맞아, 지금의 포스코를 있게 한 예수성심시녀회에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수녀원의 터였던 용광로에서 오늘도, 내일도 세계 최고의 쇳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예수성심시녀회를 설립한 푸른 눈의 아버지, 루이 델랑드 신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6월의 어느 날, 푸른 눈의 한 이방인이 대한해협 거친 파도를 넘어 부산항에 도착했다. 루이 델랑드(Louis Deslandes), 프랑스 출신 가톨릭 신부인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1923년 식민지 조선에 두 발을 내디뎠다.
1935년 겨울, 델랑드 신부는 경북 영천의 한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고, 훗날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가 되는 ‘삼덕당(三德堂)’이라는 이름의 작은 초가집에서 병든 노인과 고아를 데려다 함께 생활하며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국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일제의 탄압, 한국 전쟁의 비극 속에 생겨난 소외된 자들의 요람
서슬 퍼렇던 일제 강점기, 외국인 선교사로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지만 델랑드 신부는 한결같이 조선인 곁에 머물렀다. 조선인에게 교회 운영을 맡기며 ‘교회의 주인은 신부가 아니라 조선인이며, 조선의 주인 또한 조선인’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자 했고, 일제의 탄압과 감금(1941-1945)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광복의 기쁨을 맞았지만, 수녀원을 포항 송정리로 옮긴 지 석 달 만에 한국전쟁이란 비극이 또다시 한반도를 덮쳤다.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났고, 살 밑으로 파고드는 궁핍은 극심해졌다. 계속되는 고난에도 델랑드 신부는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 고아들을 거둘 보육원을 짓고, 버려진 노인을 위한 양로원을 세웠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움막에서 지내는 나환우에 눈물 지으며 나환우 정착촌을 마련했고, 걸식하며 떠도는 이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와 진료소를 개설했다. 그렇게 소외된 자들의 요람과도 같았던 수녀원은 대잠동으로 이주하기 전 동양 최대 규모의 시설로 자리 잡게 된다.
이국의 땅,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루이 델랑드 신부에게 우리 정부는 1962년 문화 훈장을, 프랑스 정부는 1969년 최고 훈장을 헌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