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는 단순 국제행사 개최를 넘어 인류의 진보와 미래를 제시한다. 엑스포를 계기로 도로·철도·통신 등의 인프라를 재정비하는 등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에 개최 도시에도 깊은 파급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당대 거장 건축가들은 박람회장을 근현대 도시건축의 실험장으로서 창의력을 쏟아부어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가득한 엑스포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이는 하나의 전형이 돼 도시건축에 확산되기도 한다.
역대 엑스포는 개최지마다 상징적인 건축물을 내세우고 불멸의 유물로 보전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핫플레이스인 파리의 에펠탑, 벨기에의 아토미움, 시애틀의 스페이스니들의 숨은 조력자가 바로 ‘월드엑스포’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국의 기술력을 내세우기 위해 건축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엑스포가 남긴 상징물이 개최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프랑스 파리’하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소로 ‘에펠탑’을 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파리의 상징’으로 우뚝 선 에펠탑은 사실 월드엑스포가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에펠탑은 박람회장 출입구 겸 기념물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세계적 명성을 얻어 170년 엑스포 역사가 남긴 최고의 보물로 자리매김 했다.
에펠탑은 한 교량 기술자의 손에서 탄생했다. ‘1889년 파리 엑스포’ 개최가 결정되면서, 조직위원회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맞아 열리는 만국박람회를 상징할 기념물 설계안을 공모했다. 응모작은 무려 700점이 넘었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최종 작품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 제안한 철탑이 선정됐다. 프랑스의 철강 생산력과 기술력을 내세우기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극심한 반대로 철거의 위기를 맞이한 적도 있다. 당시 철골 구조는 건물을 지탱하는 뼈대로서만 사용되었는데, 에펠탑은 뼈대를 그대로 드러낸 구조물 자체가 건물이었다. 착공 당시부터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파리의 흉물이 될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은 기한 내 건축을 마무리 짓고, 박람회 기간 동안 200만 명이 몰려들어 탑을 방문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에펠탑은 초창기 비판과는 다르게 군용 송신탑으로서의 역할도 인정받았으며, 철골 노출 구조 또한 이후 철도역사, 교량 등의 구조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과 콘크리트, 유리를 활용한 근대적 건축물의 흐름을 예측한 선도적 사례가 된 에펠탑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영구보존이 결정되었다. 에펠탑은 81층 높이의 건물과 맞먹는 330m 높이로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고, 1991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럽의 철강 강국이었던 벨기에는 ‘인류에게 걸맞은 세계 건설’이라는 주제로 1958년 브뤼셀만국박람회를 열었다. 벨기에는 자국의 철강 산업과 토목공학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과시하게 위해 철구조물을 세웠고, 그중 하나가 ‘아토미움(Atomium)’이다.
브뤼셀 북쪽 라켄공원에 세워진 아토미움은 당대 현대건축의 획을 긋는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미래 기술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함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믿음을 상징화한 것으로 원자력 에너지가 평화적으로 사용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건축 기술자 앙드레 바테르케인(André Waterkeyn)이 원자핵 분열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철의 원자 구조를 1,600억 배 정도로 확대한 형상을 본떠서 제작했다. 높이 102m에 이르는 거대한 아토미움은 지름이 18m에 달하는 9개의 알루미늄 대원구와 철골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구는 20개의 대형 튜브가 연결하고 독특한 구조를 띤다. 정육면체를 3개의 지지대가 떠받치고 있어 불안정해 보이지만 균형이 잘 잡힌 건축물로 유명하다.
1958년의 브뤼셀 박람회를 기념했던 이 초현대식 구조물은 박람회 이후 과학 관련 전시 장소로 되거나 클럽과 레스토랑 등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특히 야간에 빛을 발할 때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뾰족한 철탑 위에 우주선이 얹힌 모습을 한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미국의 우주 탐험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발단은 당시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우주개발 경쟁에서 시작된다.
1957년 10월 치열한 냉전 도중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했다. 이때 첨단 과학 기술을 세계에 알리는 게 절실했던 미국은 작은 도시 시애틀을 주목했다. 시애틀이 알래스카-유콘-퍼시픽 박람회(Alaska-Yukon-Pacific Exposition) 50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박람회를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역 행사가 국가가 주도하는 월드엑스포로 격상된 것이다.
스페이스 니들은 존 그레이엄이 설계한 철골 구조물로, 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도시 한가운데 세워지게 되었다. 승강기를 중심으로 바늘귀를 연상시키는 ‘Y’자 형 기둥 세 개와 네 개의 원반형 다발을 받쳐주는 독창적인 구조로 디자인되었다. 또한 시애틀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해 지상 1.5m에 건물의 무게 중심점이 두어 시속 320㎞의 강풍과 진도 9.5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했다. 우주·과학·미래의 비전이 담긴 이 타워는 꼭대기 우주선 모양의 공간은 300명 규모 레스토랑과 360도 회전 전망대로 채워졌다. 엑스포 당시 레스토랑 종업원들은 우주복을 입었을 정도라고 한다.
시애틀은 엑스포가 끝난 이후에도 스페이스 니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낡은 시설을 대체하고 부대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시애틀시의 역사적 랜드마크로 지정된 스페이스 니들은 지금도 해마다 100만여 명의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엑스포는 늘 시대에 앞선 주제로 세계인들의 이목을 주목시켰다. 북항에서 열릴 부산엑스포는 도시공간 개조, 인프라 확충과 같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 창출로 대전환의 시대정신을 맘껏 발산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