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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94] 류경렬 前 부사장, 인터넷 시대, PI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 미래성장 디딤돌 놓다

[남기고싶은이야기 94] 류경렬 前 부사장, 인터넷 시대, PI로 글로벌 경쟁력 확보··· 미래성장 디딤돌 놓다

2018/02/08

1973년 12월 12일, 수습 6기생으로 입사한 류경렬 전 부사장은 독일 연수를 가기 위해 연수교육을 마치고 독일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 연수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기록 때문에 그 또한 신원 불량자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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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전사 프로세스혁신 이끌며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 기반 확보
– 5년 이상 걸리는 전산화·정보화·최적화 30개월 만에 완료
– PI로 도입한 각종 시스템은 지속적인 정비, 최적화해 나가야

류경렬 전 부사장 모습 주요경력 1947 충북제천 출생 1974 연세대 금속학과 1983 포스코 입사 압연1부 열연공장, 생산관리실 공정1과 생산관리실 열연 공정계장, 선강분괴 계장 생산관리부 선강분괴공정과장, 공정조정과장, 광양생산기술부 생산계획과장, 차장 광양 생산관리부장, 공정부장, 생산기술부장 기술본부 기술행정실장, 기술실장, pi실장, 상무(정보시스템실, pi실, 수주공정실, 품질서비스실, 판매생산계획실 담당) 전무이사(마케팅부문,pi실,pi지원실,품질서비스실, 판매생산계획실담당) 전무이사(마케팅부문, pi실,pi지원실,판매생산계획실,품질서비스실) 포항제철소장(부사장) 2006 rist 원장 상훈 1976 국무총리 표창 2004 철탑산업훈장

1973년 12월 12일, 수습 6기생으로 입사한 류경렬 전 부사장은 독일 연수를 가기 위해 연수교육을 마치고 독일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 연수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6.25 전쟁 중에 좌익 활동을 했다는 기록 때문에 그 또한 신원 불량자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나는 네 살 때 6.25 전쟁 중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자랐는데, 대학에서 ROTC에 지원했다가 아버지의 좌익 활동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도 모르고 있어요. ROTC는 군 장교 양성 과정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산업체에서 보내는 해외 연수도 갈 수 없다니 아뜩한 심정이었죠.”

공과대학 금속공학과 출신의 엔지니어로서 신예제철소의 가동에 꼭 필요한 해외 선진 제철소 연수에 참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열연공장에 있었으나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체념하고 아무데나 보내달라고 해서 1975년 8월 옮겨간 곳이 생산관리부 열연공정과였다.

“생산관리부에도 엔지니어들이 포진하고 있었지만, 그 일이 엔지니어의 본령은 아니었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일에만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시의 답답함을 떨치고자 한 것이었어요.”

1977년 4월 24일, 당시의 포스코 요원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제강사고가 났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연공정과의 핵심요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대형 화재로 제강공정이 올스톱되었으니 용광로에서 생산한 쇳물을 받아줄 데가 없어졌고, 열연에서는 조업 소재인 슬래브를 공급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해외에서 슬래브를 수입해 압연조업을 이어가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슬래브 수급이나 해외 조달 관련 사항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어 브라질로 출장을 가야 했다.

“그때도 또 신원이 문제가 되었어요. 그런데 박태준 사장께서 신원보증을 서주셔서 처음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슬래브 조달 문제를 매듭짓고 브라질의 국영 CSN을 거쳐, 나간 김에 미국의 LTV 등도 훑어보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철소라면 모두 똑같은 것으로 알았는데, 해외 제철소들은 포항제철소와 구조가 사뭇 달랐어요. 그래서 포항제철소는 일본의 기술지원을 받아 지은 것인데, 앞으로 우리 손으로 제철소를 짓는다면 더 잘 지을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바로 그해 제2제철 건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1974년 정부에서 추진하다가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지 않아 포항제철로 흡수, 합병되었던 제2제철 건설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다. 아직 건설 입지와 실수요자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포스코는 내부적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박태준 사장이 제2제철은 국가적으로 꼭 필요하고 어차피 추진될 사업이라고 생각해 작업을 추진시킨 것이었다.

“제2제철 실수요자가 포항제철로, 건설 입지가 아산만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81년 11월 광양만이 제2제철소 입지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유상부 설비기술본부 차장이 주축이 되어 사업을 추진했는데, 나도 생산관리부 공정조정과 소속이었지만, 제2제철 건설 관련 일을 하고 있었어요. 브라질 출장 시에 가슴에서 꿈틀거렸던 그 무엇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지체없이 광양제철소 건설에 지원했습니다.”

광양제철소 창설멤버로 13년간부문 최적화 개선에 힘써
당시 정명식 부사장으로부터일하는 방법 많이 배워

1983년 10월 24일 그는 광양 생산기술부 생산기획그룹으로 명령이 났다. 그날은 광양제철소 발족일이었다. 정명식 부사장의 지휘 아래 광양건설본부가 현지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지만 제철소 조직은 그날 처음 만들어졌다. 장세훈 제철소장, 김종진 부소장, 김영준부장, 이현일 차장, 박인백 차장, 류경렬 과장, 김정원 과장 등이 광양제철소의 창설 멤버였다. 당시 포항제철에는 광양 근무를 회피하는 분위기가 완연했지만,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바로 지원했다.

“효자 주택단지에서 누구네 남편은 포항에서 밀려서 광양으로 갔다는 등의 소문이 돌 정도로 광양을 회피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나 나에게 있어 광양 시절은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정명식 부사장께서 건설과 조업 양쪽을 모두 관장하고 계셨는데, 매주 2회씩 회의를 주재하시면서 앞으로 광양만에 웅자를 드러낼 제철소의 모습을 구상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정명식 부사장으로부터 일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아, 일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무릎을 칠 때가 많았지요.”

보고를 받는 정명식 부사장은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다. 보고 내용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특정인만이 아니라 당시 보고에 참여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너나없이 물류, 레이아웃, 설비 효율성, 인력, 경제성 등 모든 면에서 포항제철소보다는 훨씬 뛰어난 제철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모든 걸 꿰차고 계시더군요. 잔소리하듯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당신의 뜻대로 일을 끌고 가시는 거였어요. 나는 1984년부터 1987년 1기 가동 시까지 생산관리 시스템 확립에 나름대로의 열정을 바쳤습니다. 이후 1996년 10월 기술본부 기술행정실장 명령을 받아 포항으로 돌아오기까지 만 13년을 광양에서 보냈습니다. 1987년 1기 설비 조업대비 계획을 세우면서 운송출하부는 부단위로서는 없어져야 할 부서라고 생각했고, 결국 내 생각을 관철시켰습니다.”

그는 입사 이후 거의 10년간 몸담았던 포항 생산관리부 근무 시절부터 운송출하부는 축소되어야 할 부서로 생각하고 있었다. 포스코의 생산-판매는 전량 주문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제강 공정에서는 주문에 따라 강(鋼)의 성분이 결정된다. 자동차용, 건설용, 선박용, 기계용, 교량용 등 용도에 따라 탄소, 규소, 망간 등 첨가물의 종류와 양이 달라진다. 그리고 자동차용이라 해서 모두 같은 것이 아니고 품위에 따라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게 된다.

마케팅 부서에서 주문을 받아 제철소에서 생산하는 체제이지만 제철소에서는 개개 수요자의 주문 단위대로만 생산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여러 주문량을 묶어 생산단위를 만드는 일 즉, 로트(Lot) 편성 작업은 생산관리부에서 수행했다.

“지금은 수주공정실에서 하고 있는 이 업무를 포항제철소 생산관리부에서 10여년 가까이 맡아오는 동안 나는 포스코의 수주-생산-출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연합철강과 일신제강이 국내 양대 냉연업체로서 많은 양의 냉간압연용 핫코일을 주문했는데, 생산관리부에서 연합철강에 공급할 품목으로 생산 지시한 제품을 운송출하부에서 일신제강에 출하하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 반대의 사례도 있었고 다른 모든 품목에서도 이런 일은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운송출하부의 그러한 업무 수행 방식이 회사 규정상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판매, 생산관리, 출하 업무가 흡사 서로 다른 회사의 일처럼 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판매에서는 수주할 때 가격, 물량, 납기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러한 고려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사적인 고려가 아닌 각 부문의 최적화를 추구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었다. 고객 입장에서는 주문한 제품을 빨리 공급받기 위해 어디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한 형편이었다. 판매, 생산관리, 운송출하 등 각 분야가 하나의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편리한 대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할업무 최적화로 체선료 연간 200억 원 이상 절감 효과 거둬
과장시절 전사 최적화 관점에서 효율적인 조직 편제 건의

“광양에서는 운송출하부 없이 생산관리부에 출하과를 두어 거기서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과장 때부터 계속 그렇게 건의했더니 결국 받아들여졌어요. 그때 내가 끈질기게 건의해서 생기지 않은 부서가 운송출하부 말고도 구내운송부도 있었어요. 구내운송부에 원료 하역 기능이 있었는데, 그것도 생산관리부에서 맡도록 한 겁니다. 생산관리부는 스케줄링 개념이 생명이기 때문에 판매는 물론 원료 쪽과도 소통이 원활했습니다. 그래서 원료 운송 선박의 항해 정보를 파악해 원료 하역 일정과 조업, 정비 등 다른 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함으로써 연간 200억 원 이상의 체선료(滯船料) 절감 효과를 거두었어요.내가 만약 부장이나 소장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담당 과장이었기에 팩트를 핵심적으로 볼 수 있었고 기타사항 고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1996년 10월 들어 그는 기술본부 기술행정실장에 보임되면서 포항으로 돌아왔다. 광양제철소 창설 멤버로 참여해 포항을 떠난 지 13년 만의 귀환이었다. 해가 바뀌어 1997년 촉발된 외환위기는 국내 산업계에 연쇄 도산이 이어지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해외 시장에서 탄탄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포스코는 이 풍파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사태는 포항 괴동역에 고로 슬래그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문제를 초래했다. 관계 부서에 물었더니 외환위기로 건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시멘트 수요가 급감한 나머지, 시멘트 회사에서 슬래그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술행정실장으로서 우선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고로 슬래그가 시멘트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용도를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20년 이상 그걸 판매했으면서도 그냥 시멘트 제조에 쓰인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정확한 용도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담당자 1명을 대동하고 단양, 동해, 영월 등지로 시멘트 회사 방문에 나섰어요. 알아보니 고로 슬래그가 시멘트와 같은 성분의 물질이었습니다. 산화칼슘(CaO), 산화규소(SiO2), 산화알루미늄(Al2O3)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품에 따라 조성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어요.”

시멘트 회사들은 고로 슬래그가 필요한데도 외환위기를 핑계로 서로 담합해 그때까지 거래해온 톤당 2000여원대의 가격은 물론 운송비까지 포스코에서 부담해 달라면서 어깃장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카르텔을 깰 수 있는 길은 수출선(輸出先)의 모색이었다.

“국내와 비슷한 가격으로 타이완(臺灣) 수출 길을 열었어요. 그랬더니 국내 수요처에서 서둘러 가져가는 바람에 괴동역이 싹 비워졌습니다. 고로 슬래그는 지금까지도 타이완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든 모르면 당하는 겁니다.”

1998년 12월 31일에는 PI실장으로 보임되었다. 이후 상무보, 상무 전무이사를 거쳐 부사장으로서 포항제철소장이 된 2004년 3월까지 5년여 동안 PI는 그와 함께 하였다.

“1998년 말일은 명령상의 날짜이고 사실은 12월 18일 조직이 만들어져 거기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구택 사장께서 PI실장으로 지명해서 명령이 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먼저 다른 두 사람에게 맡겼지만,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세 번째로 나에게 떨어진 일이었어요. 그만큼 PI는 낯설고 험난한 일로서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황경노 부회장 시절 구상한 빅피쳐, 36개 과제로 세분화해 실현
유상부 회장의 전폭적 지지와 포스코 조직력이 성공요인

그는 구매, 생산, 판매 등의 계획 수립부터 제품 출하할 때까지가 PI(Process Innovation)의 영역이라고 했다. 포스코 업무의 전반을 다루는만큼 PI의 범위는 방대하였다.

“그 당시에도 이미 포스코는 수주에서 생산계획, 제조 투입, 제조, 입고, 출하까지의 시스템이 매우 선진화된 제철소였습니다. 박태준 명예회장을 필두로한 당대 최고의 우리 선배들이 PI 도입 이전부터 대대적인 전산 투자를 통해 앞선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1996년 이후 인터넷이 급속히 발전하는데, 이걸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어요. 전산 시스템은 앞서 있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데이터를 경영 자산으로 활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PI를 추진하면서 데이터의 정보자산 활용에 역점을 뒀습니다. 소통화, 표준화를 통해 막힌 것을 뚫어야만 가치 있는 데이터가 나오기 때문이죠. 그 결과 다른 기업에서 5년 이상 걸린 전산화, 정보화, 최적화 작업을 2년 반 만에 완료했습니다.”

PI의 도입, 적용은 어느 기업, 어느 조직에서나 많은 거부와 저항, 심지어는 추진 조직에 대한 음해까지 각오해야 하는 프로젝트였다. 각 부서는 그동안 관행으로 굳어져온 나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전통이지 이는 고질화된 타성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과감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저항에 부딪쳐 좌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유상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를 별도로 불러 지시하셨어요. 무엇보다 ‘매우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는 불만 세력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슬기롭게 견뎌야 한다는겁니다. ‘이것은 업무 자체의 기술 문제가 아니고, 하나의 정치 게임이다’는 말씀에는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어요.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약 도덕적으로 무너지면 그날로 추진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외부 컨설팅 업체 전문가들이 PI 추진에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기술자이면서도 세계적인 비즈니스 전문가들로서 사람 구워삶는 데는 선수라는 사실을 유념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말씀의 요지는 과감히 혁신활동을 하되, 조심하라는 것이었어요. 포스코의 PI 추진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한 패키지 업체들의 시기, 질투와 모함도 예상될 수 있는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내의 저항 세력과 사외의 배 아픈 세력이 결탁할 수도 있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유 회장께서는 PI 추진의 본질적인 문제는 물론, 추진 과정에서 본질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소한 문제들까지 다 꿰고 계셨습니다. 일만 보고 나아가는 게 엔지니어의 자세지만 이 일은 다른 요소들을 잘 살피면서 가야 한다, 어쩌다 사소한 일에 걸려버리면 일을 잘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는 말씀에는 어떤 비장감마저 느껴지더군요. 나는 그때까지 현장에만 있었기 때문에 마케팅, 공급사, 고객사 등에 연이 전혀 없었는데, 이것이 이후 프로젝트 추진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포스코 직원들과 관련회사의 헌신이 PI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PI 실 요원들은 포스코센터 4층 사무실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헌신했습니다. PI는 일시에 전면적인 개혁인 빅뱅 방식의 혁신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반복적인 사전 테스트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절대적인 테스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요원들은 24시간 체제로 근무했습니다. 세계적인 부호인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회장도 매달 PI 글로벌 콘퍼런스 콜에 직접 참석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외 예측시스템을 담당했던 i2, 컨설팅의 PwC, 최신 슈퍼돔 서버를 제작한 HP, 통역사들도 무척 고생하였지요. 당시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그때, 우리는 우향우 정신으로 하나 되어 일했습니다.”

포스코의 PI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강점을 접목하는 작업이었다. 선배들이 구축한 튼튼한 오프라인의 몸체 위에 어떠한 환경 변화에서도 능히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미래의 IT날개를 다는 온라인화 작업이었다. 고객지향적으로 모든 프로세스를 새롭게 설계하고 세계 최초로 오라클 전모듈을 적용하고, 데이터 웨어하우스(data warehouse), 데이터 딕셔너리(data dictionary), EAI등의 시스템을 빅뱅 방식으로 도입한 방대한 규모의 프로젝트로 평가된다.

실제로 PI는 성과적인 측면뿐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도 당시 세계적인 규모였다. 30개월 동안의 산출 문서가 무려 8톤(A4지 세로 493km) 분량이나 되었고, 개발 화면수가 4,800종, 개발 장표 수는 320종에 달했다. 데이터 이행 항목 수는 43억개였고, 적용된 모듈만 해도 ERP 40개, SCP 11개, 맥시모 12개, 아르테미스 1개 등 64개에 이른다. 또한 이를 운영하는 서버인 HP사의 최신예 수퍼돔 1호기는 미국 상무성으로부터 전략 물자 수입 허가서를 받아야 했고, 2호기는 NASA에 납품 될 정도로 세계 최고 성능의 장비였다. 한편, PI실 인력은 1998년 12월 31일 30명에서부터 시작해 최대 970여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멤버만 해도 포스코 직원(PI실 요원, 슈퍼유저), 포스테이터(現포스코ICT 모듈요원, 개발요원), PwC, 오라클, i2, 통역 등 다양한 출신 배경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PI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PI를 시작한 1998년도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996년도에 비로서 웹브라우저(Web browser)가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상업화, 대중화를 맞이한 인터넷과 이메일은, 지금은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모든 것을 하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규모의 경제가 소멸되고 디지털 문화로 전환되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전통적인 제조업으로 t(traditional)-비즈니스에 속하는 철강산업을 하는 포스코가 어떻게 하면 세계 철강산업을 리드하며 IT경영으로 고도의 효율과 부가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삶의 질도 향상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PI를 하고 ERP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t-비즈니스에 IT의 날개를 달아서 궁극적으로 e-비즈니스화 하자는 것이었어요. 유상부 회장은 그 당시 포스코를 큰 덩치에 작은 날개를 가져서 날지 못하는 새, 타조에 비유하셨어요.”

“PI란 한마디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PI를 통해 모든 업무를 전체 최적화 차원에서 하되, 고객중심으로 업무절차를 혁신하고 이를 바탕으로 ERP를 도입하여 전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개방적인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고자 하였지요. 사실 포스코는 나름 방대한 량의 오프라인 정보와 처리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면서 기존의 오프라인 정보와 지식들을 표준화시키고,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해 함께 공유하고 외부와 소통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것이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가장 효율적이고 투명한 경영이며, 전자상거래에 바탕을 둔 디지털 경영의 첫걸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잘 짜여져서 돌아가고 있는 오프라인 정보와 시스템을 새롭게 디지털 데이터화, 표준화시키고 투명하게 외부와 소통시킨다는 것은 정말 모두의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PI는 수없이 ‘없애고, 버리고, 바꾼다’를 반복해서 외치며 궁극적인 고객 지향의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작업이었어요.”

36대 과제 중심의 오너십 제도운영··· 전임원에게 오너십 부여

PI라는 일 자체의 어려움도 어려움이거니와 이를 추진하기 위해 벌어야 하는 설득과, 소통 등의 작업은 본질이 아닌 일이면서도 본질보다 더 어려웠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PI를 추진했고 이를 통해 회사의 전 분야가 일신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PI추진팀에서 도출한 중점 추진 항목들은 실은 훨씬 이전 황경노 부회장 시절에 추진한 8대 과제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1980년대 말 무렵부터 황경노당시 부회장께서 2년여에 걸쳐 추진하시다가 기획실로 넘겨 마무리하라고 했으나 실제 각부서 업무에 녹아들게 하지 못하고 마무리된 것이 8대 과제였습니다. PI도 외부 컨설팅 업체에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 아니고 포스코 임직원들이 자체적으로 도출한 과제였어요. PI를 추진하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토론을 거쳐 36대 과제를 도출했는데, 내용을 놓고 보니 황경노회장께서 추진한 8대 과제를 세분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황 회장께서는 지금과 같은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PI는 아닐지라도 이미 그와 유사한 개념의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 포스코의 PI 추진에서 외부 용역업체들은 스킬파트(Skill Part)만 담당했을 뿐 모든 아이디어는 포스코에서 자체적으로 도출한 것이었어요.

이처럼 36대 과제는 포스코가 30년 동안 일관하여 제철소를 경영하면서 나온 문제점 중에 임원진이 우선 순위를 두어 직접 선정한 것이고,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개선하려고 했지만 바꾸지 못한 포스코의 숙원 과제였기 때문에 과제 중심의 PI를 추진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했지요. 마스터 플랜 수립과정에서 자문역을 맡던 최병진 박사와 PwC가 To-Be 프로세스 별 오너십 제도를 주장했지만, 독특한 포스코 기업문화와 PI가 방대한 프로젝트임을 감안할 때 포스코의 PI 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와 달리 36대 과제를전임원에게 오너십을 부여하여 추진하도록 했어요. 그 결과 포스코 전체 임직원들이 한마음으로 PI를 추진하여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누구 몇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ERP는 수단에 불과, 내부 역량에 따라 기업가치 향상 여부 결정돼
기업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부분 최적화 마인드, 시스템 퇴보 초래

PI를 추진하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인데, 포스코처럼 잘 준비된 조직은 제대로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이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외부 컨설팅 업체의 분석이었다. 그런 고민 없이 진행해서는 성과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견해였다. 흔히 ERP를 도입하면 PI가 다 된 것으로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ERP 시스템을 판매하는 업자들도 대개 ERP를 도입하면 PI가 완성되는 걸로 설명하죠. 그러나 ERP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수단을 이용해서 어떻게 기업 가치를 높이느냐 하는 것은 회사의 내부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수단도 중요하지요. 황경노 회장께서당신의과제를현실화하지못하신 것은 당시에는 실업무에 적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십 수년 후에 유상부 회장께서 강력히 밀어붙여 성공시킨 거지요. 유상부 회장께서 삼성재팬 사장으로 계실 때, 전임 사장이 PI의 밑그림을 그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때 ERP와 PI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확신을 얻은 것이었어요.”

포항제철소 통합조업시스템 가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2005년 1월 25일 포항제철소 통합조업시스템(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 가동식에서 (왼쪽부터)포스데이타 이동근 상무, 신기철 부소장, 류경렬 포항제철소장, 김진일 PI담당 상무, 하상욱 부소장이 MES 가동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PI 실현으로 포스코에는 실질적인 변화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장의 실업무에서 생겨난 긍정적인 변화들은 곧 포스코의 경쟁력이 되었고, 그로인해 포스코는 경쟁 제철소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며 시장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코 PI는 워낙 광범위하게 추진된 프로젝트이다 보니 특별히 어떤 성과를 ‘PI의 결과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첫 번째는 45일이던 제품의 납기가 PI를 통해 15일로 줄인겁니다. 업계에서는 정말 천지가 개벽되는 것과 같은 결과였지요. 기존의 납기가 1/3로 줄어든다는 건 포스코뿐만 아니라 고객입장에서도 계산할 수 없는 부가가치가 있어요. 고객이 납기를 문의하면 즉시 대답해 줄 수 있게 되었고, 납기 적중률이 높아진 것은 물론, 제품 재고일수도 줄고, 원자재 재고량도 줄고, 납기 단축으로 좋아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PI로 납기 단축(45→15일) 하고 제품 판매 수익성 높여
MRO 자재 표준화(35만→11만 종) 및 일일 결산 체제 구축

“두 번째로는 PI 추진으로 판매 제품별 개별 원가와 수익성을 판매원이 알고 제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결과 판매원은 자연스럽게 수익이 최대가 되는 제품을 더 많이 판매하고, 수익이 낮은 제품들은 그 원인을 파악해 생산단가 절감 방안을 찾게 되면서 포스코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되었어요.

세 번째는 MRO 자재관리 표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제철소 설비들의 정비를 위해 사용되는 정비용 자재 품목들을 UN에서 추천하는 방식으로 표준화를 시켜보니, 종전의 35만 여종으로 분류되던 품목들이 11만 종으로 단순화되었습니다. 이렇게 표준화를 해 놓고 보니 어느 품종은 같은 부품임에도 불구하고 포항, 광양, 선강, 압연 등의 부서에서 서로 다른 5종으로 분류된 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부품을 구매 가격도 다르게 구매하여 제각각 재고관리를 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하나 더 얘기하자면 사실 포스코 직원들로부터 가장 칭찬받았던 성과인데, 결산기간을 1일 단위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그 전까지는 많은 직원들이 약 1 주일 야근을 해도 결산을 할 수 없었는데, 하루 단위로 결산이 되어버리니 업무 부담도 줄고 야근할 일도 없어져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진정 포스코가 대학생이 일하고 싶어하는 기업 1위가 된 계기가 아닐까 해요.”

PI는 한번 도입했다고 해서 가만히 두어도 계속적으로 기능하는 영구재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시간의 경과, 경영층의 변화, 대폭적인 조직구성의 개편 등이 일어나면 이전처럼 기능 중심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어떤 부문에서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무시하고 부분 최적화를 추구하다 보면 PI의 퇴보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분 최적화는 다른 부문의 프로세스 이탈을 부채질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구매, 마케팅, 조업, 정비 등의 각 분야가 따로 놀면서 시스템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포스코의 생산제품 평균 재고가 150만 톤 수준이었습니다. 이게 PI 도입 이후 30만 톤으로 줄었어요. 그런데 생산량의 변화가 없는데도 지금 다시 150만 톤 수준으로 늘어났습니다. 120만 톤 정도가 고객에게 인도되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는 겁니다. 8000억 원 내지 1조 원의 돈이 현장에 묶여 있는 거예요. 이런 게 바로 퇴보입니다. 시스템 자체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인드가 시스템 중심에서 섹션 중심으로 발전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지요.”

2004년 포항제철소장이 되고 나서도 제철소의 운송출하 기능을 마케팅으로 옮긴 것은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사실 신입사원 시절부터 포항제철소 생산관리부에서 근무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이후 광양제철소 조직 편제에 반영시킨 후 PI 추진 프로젝트를 맡아 전사적인 체제를 굳힌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후에도 줄곧초급 실무자 때부터 지속적으로 키워왔던 문제의식을, PI라는 기회를 만나 전사 임직원들과 함께 사내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해결해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라며 감사히 여겼다.

6시그마 도전 골든벨에서 문제를 출제하는 류경렬 포항제철소장의 모습
류경렬 포항제철소장이 2004년 11월 9일 포스텍 체육관(사진)과 광양제철중학교 체육관을 연결해 열린 ‘6시그마 도전 골든벨’ 에서 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품질, 가격, 납기 경쟁력 과인적 우월성으로 글로벌시장 선도하길

디지털포스코책

유럽이나 미국의 예와 같이 한국에서도 ‘철강업의 사양화’ 이야기가 더러 나오지만, 그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미국에서는 철강업 이전에 철강다소비업종이 먼저 사양화의 길을 걸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철강다소비업종이 산업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중국과의 경쟁에서도 불리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에 비해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잘 따져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중국보다 불리한 것은 인건비 하나인데, 철강업의 총 코스트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5% 정도입니다. 이걸 가지고 사양화 운운하는 것은 엄살이에요. 프리미엄 제품뿐만 아니라 일반 제품도 마찬가집니다. 품질, 가격, 납기의 3대 경쟁력은 포스코의 절대 우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적 자원의 우월성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PI를 통해서 우리 포스코인들은 양적성장이 정체된 상태에서 창사 30여년 만에 전면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이를 통해서 회사가 어떠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당시에 ‘디지털 포스코’라는 책으로도 출판하였으니, 포스코 도서관에서 한번씩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지금 포스코를 짊어진 후배들은 우리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준재들입니다. 아무 걱정 말고 파이팅하시기를 바랍니다.”

포항제철소 산소공장 제12호기 준공식 모습. 왼쪽부터 설비공급사 에어리퀴드(Air Liquide)사 두칠렛(Ducholet) 부사장, 류경렬 포항제철소장, 포스코건설 고영균 부사장
2005년 5월 31일 포항제철소 산소공장 제12호기 준공식에서 (왼쪽부터) 스위칭을 하고 있는 설비공급사 에어리퀴드(Air Liquide)사 두칠렛(Ducholet) 부사장, 류경렬 포항제철소장, 포스코건설 고영균 부사장.

우재욱 <시인·작가>
포스코 창립 50돌 특별기획 남기고 싶은 이야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56편 이후 모아보기 1편부터 55편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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