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7월 4일 포항제철소 생산설비 중 최초로 준공, 조업에 들어간 중후판공장이 가동 한 달도 채 안 돼 변압기 사고를 일으켰다. 영일만 허허벌판에 들어선 설비래야 창고설비, 시험검정설비, 건설 중인 1열연공장뿐이었는데, 중후판공장은 열연공장보다 한 달 늦게 착공되었지만, 열연공장보다 석 달 빠른 1972년 7월 4일 가동에 들어가 포스코 최초의 공장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최휘철 전 이사는 당시 입사 6개월밖에 안 된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정비 외길 인생··· 전기·기계 분야 전문성 인정받아
– 1989년 국내 최초 방사광가속기 건설사업 기반 다져
– 2001년 인천국제공항 수하물 시스템 완성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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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4일 포항제철소 생산설비 중 최초로 준공, 조업에 들어간 중후판공장이 가동 한 달도 채 안 돼 변압기 사고를 일으켰다. 영일만 허허벌판에 들어선 설비래야 창고설비, 시험검정설비, 건설 중인 1열연공장뿐이었는데, 중후판공장은 열연공장보다 한 달 늦게 착공되었지만, 열연공장보다 석 달 빠른 1972년 7월 4일 가동에 들어가 포스코 최초의 공장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최휘철 전 이사는 당시 입사 6개월밖에 안 된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선공정인 제선과 제강에서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일본으로부터 반제품인 슬래브를 수입해서 하루 반나절 정도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포항제철소는 최종 4기까지 거의 모든 설비를 일본에서 들여왔지만, 최초로 준공된 중후판공장만은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Voestalpine)에서 설비를 도입했어요. 그러다 보니 기술 전수도 그 사람들로부터 받아야만 했고, 다른 공장의 일본인 슈퍼바이저의 도움도 받을 수도 없는 거야. 설령 일본인 기술자들이 해결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설비에 손을 대려 하겠어.”
이천전기에서 3년간 경력 쌓아··· 제철소 변압기 문제 해결에 활약
그는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전역한 후 3년간 이천전기에서 변압기의 설계, 제작, 시험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1972년 2월 경력직으로 포스코에 입사했다. 바로 이어 4기생들이 입사했지만, 그들은 학교 공부밖에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변압기에 관한 한 이천전기에서 나름대로 경력을 쌓을 만큼 쌓았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전기공학과 선배님인 안정준 이사와는 이천전기에 이어 포스코에서도 함께 근무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결국은 경력직들이 변압기 사고를 해결하기로 하고 박태준 사장께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나 사장께서는 어쩐지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셨어요. 대답을 안 하시는 거야. 그렇다고 오스트리아 기술자를 부르라는 것도 아니고.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며칠 지나 사장께서 ‘너희들 뜻대로 해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결국 우리 손으로 깨끗이 해결했어요. 포항제철에 입사해 거둔 첫 업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당시 후판공장 변압기 사고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여러 대가 한꺼번에 고장을 일으켰다. 고장 난 것을 분해해서 소손된 부품은 버리고 괜찮은 것을 따로 모아서 하나의 변압기로 만들기도 했다.
“현장에 나와 있던 오스트리아 기술자들은 공장 컨트롤 계통 전문가였지, 변압기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괜히 우리의 작업에 딴지를 걸기도 했고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해 우리를 상당히 곤혹스럽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그들은 변압기 분야든 공장 컨트롤 분야든 한국의 전체적인 수준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변압기 내의 철판을 우리는 한 장씩 빼내는데, 그들은 한꺼번에 하자고 하는 거야. 해보라고 했더니 결국 못하더군. 우리 전기 기술자들의 실력이 만만찮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거였어요.”
1977년 1월 전기수리과장이 되기까지 그는 공작정비공장 기술계, 공무기술실 정비기술계, 제선정비과 고로정비계, 전기계장과 기술계 등을 거치며 오직 정비 외길을 걸었다.
“정비 사이드는 라인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남의 설비에 가서 전을 펴야 했어요. 정비 현장에 필요한 부품 구매를 요구할 때 유럽 스펙을 주문했는데, 일제가 들어와서 혼선을 빚기도 했습니다. 원리는 같았지만 부분적으로 다른 데가 있었거든. 예를 들면 결선(結線) 방법이 다른 겁니다. 결선 바꾸는 작업을 수도 없이 수행한 기억이 뚜렷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잘한 사고가 꼬리를 물었지요. 당시는 기술뿐만 아니라 구매, 검수, 행정 쪽에서도 그만큼 미숙했던 거지요.”
정비 업무는 크게 기계수리와 전기수리로 나뉘는데, 두 작업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함께 어우러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서로 이해의 폭을 넓게 가져야 한다고 했다. 오래 일하다 보면 어느 정도 서로 통하게 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전공을 존중하는 것이 작업을 슬기롭게 마무리할 수 있는 지혜라고 했다.
“초창기에는 양 분야가 우선 마인드에서부터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오래 같이 일하다 보면 상대 분야에 대한 안목과 기술도 상당 수준에 이르게 되고, 서로 이해의 폭이 넓어져 서로 마찰 없이 작업을 마무리하게 되지만, 어떤 문제가 사고 원인과 복구의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할 때는 전공 파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옳아요. 오랜 현장 경험에서 터득한 사실입니다.”
1977년 제강 화재 사고, 잊을 수 없는 기억
김준영 본부장의 빠른 결단으로 화재 피해 최소화
1977년 4월 24일 일어난 제강 화재 사고는 당시 기술자들의 뇌리에 공통으로 각인되어 있는 악몽이지만, 그는 특히 공무부 전기수리과장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마치 자기 집에서 겪은 것처럼 떠올리고 있었다. 약 3개월 동안 포스코 기술자들이 겪은 고생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는 말로 당시를 회고했다.
“새벽 6시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고, 곧이어 한경식 전 건설본부장이 차를 갖고 집으로 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불이 꺼진 것은 12시가 다 되어서였어요. 그러나 쏟아진 용탕(鎔湯)이 케이블덕트로 흘러들어가 케이블의 피복재가 계속 타들어 가고 있었던 거야. 그 많은 동선(銅線) 한 가닥 한 가닥이 피복재로 나뉘어져 각각의 전기, 전자적 기능을 하는 것인데, 피복재가 타버리는 바람에 한 덩어리가 되어 그 거대한 제강공장의 신경망이 해체되고, 설비들이 제멋대로 구동되는 상황이 빚어진 겁니다. 공장을 태우는 불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던 거지요.”
정오를 넘어서자 케이블을 잘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김준영 공작정비본부장(상무)이 나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한 뒤 결국 케이블을 포기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데군데 자를 데가 많았다. 다 자르고 나니 오후 4시였다. 제강공장이 올스톱되고 전 제철소가 가동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현장에 도착한 일본인 기술자는 변압기는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괜찮다고 했더니 100도 이상의 고열 속에서 변압기가 괜찮을 수가 없다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계병도 이사가 지휘해서 변압기에 계속 물을 뿌렸기에 변전실 전체가 불에 탔지만, 변압기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복구 공정을 늦추려 했고, 우리는 하루라도 더 당겨 급속히 진행하려 했습니다. 만약 그때 변압기 모두를 교체해야 했다면 복구가 한참 늦어졌을 겁니다. 특정 공장에 쓰는 대형 변압기는 기성품을 쓸 수가 없습니다. 모두 주문 생산이기 때문에 제작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초기 상황에서 쇳물이 케이블덕트로 서서히 스며들어갔기 때문에 공장을 삼킬 듯한 화염이 발생하지는 않았고 모두들 금방 꺼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회고했다. 케이블은 이미 멀리까지 열이 올라 불이 붙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니 밖에서 보이는 대로 곧 꺼진다고 생각했고, 조금 뒤에는 꺼졌다고 판단해 이후의 일을 생각하느라 일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쇳물이 케이블을 타고 사방으로 전파되면서 실질적인 대형 화재가 일어나고 만 것이었어요. 케이블의 화재는 모래로 끌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때 김준영 공작정비본부장이 케이블 절단을 망설였다면 공장 전체가 불타고 말았을 겁니다. 케이블을 끊었기에 기계들은 모두 살릴 수 있었습니다.”
4시쯤 되어 회의가 열렸는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혼선로에 전기 공급이 다급하다는 소식이 회의장으로 전해졌다. 혼선로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 그 큰 혼선로와 거기에 담긴 쇳물이 한 덩어리로 굳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급히 창고로 가서 자재를 다 훑어보고 예비품을 최대로 동원했어요. 리크레이머(Reclaimer)용 케이블을 가져와서 일단 혼선로에 연결해 전기를 공급했습니다. 이 작업은 다음날 아침까지 철야로 수행했습니다. 오후에는 제강공장에서 분괴공장으로 가는 열차의 전기를 살려냈고, 전로 후공정인 형발장 공정도 케이블을 최대로 동원해 살려낸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요인이 되었어요.”
1980년 1월에는 2열연공장 커미셔닝추진반장으로 보임되었다. 커미셔닝이란 공장 건설이 완료된 후 건설팀과 조업팀 사이에 공장을 인계인수하는 전 단계로 건설, 전산, 정비, 조업 분야가 한 덩어리가 되어 모든 관리 팩트를 총점검하는 조업준비 단계를 말한다. 당시 2열연은 관리 팩트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그 계획에 충실하게 진행함으로써 문제없이 끝낼 수 있었다.
“커미셔닝은 일종의 시뮬레이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열연공장은 길이가 1200m에 달하는 포항제철소 최대의 공장인데 일본 미쓰비시에서 설비를 도입했고, 신일철의 조업지도를 받았습니다. 일본 오이다(大分)제철소의 경험 있는 기술자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커미셔닝에서는 어느 한 분야가 주도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기술 분야가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시키겠다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 포스콘 사장으로 재임할 때 인천국제공항 수하물 배송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사광가속기 건설추진본부장 보임··· 초기 조직안정화에 힘 쏟아
이후 포항제철소 압연정비부 차장과 설비관리부장을 거쳐 1989년 방사광가속기 건설추진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사광가속기 건설 문제를 두고 대화가 오간 것은 박태준 회장과 김호길 포항공대 초대 학장이 만난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박태준 회장은 김호길 박사로부터 가속기를 건설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태준 회장은 포항공대가 단기간에 세계 유수의 명문 대학으로 성장한다면 가속기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987년 포항공대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출범하자 박태준 회장은 김호길 학장에게 전화를 했어요. 포스코 창립 20주년인 1988년 4월 1일 가속기 건설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제안서를 조속히 이사회에 제출하라는 것이었지. 박태준 회장은 김호길 학장과의 약속을 머리에 담아두고 그동안 방사광가속기가 어떤 것인지를 다각도로 알아보았는데, 그 결과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서나 이제 막 태어난 포항공대의 세계적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나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던 겁니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김호길 학장이었다. 개략적이나마 가속기 제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모여 최소한 1년 이상의 작업을 해야 하는데, 당시 국내에는 김호길 박사를 제외하고는 가속기 전문가가 전무한 실정이었다. 김호길 학장은 대학을 정상 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다고 판단되는 2년 후에 추진하기를 건의했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당장 착수하지 않으면 기회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김호길 학장을 채근했다. 김호길 학장은 박태준 회장의 의지를 확인하고 가속기 건설에 착수하기로 결심했다.
“국내 최초의 이 사업을 추진할 당시 방사광가속기에 대한 이해 자체를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무원을 중심으로 한 정부당국의 관심, 교수들의 생각, 건설기술자들의 생각, 오퍼레이팅을 담당할 과학자들의 생각이 모두 제각각이었으므로 이들의 생각을 한 군데로 모을 의식의 구심점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요긴했습니다. 제철학원 에서도 이를 관리할 능력이 전혀 없었고, 교수들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건설 기술자들도 고개를 저었어요. 일반 토목이나 건축에서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초정밀도를 요구했으니까.”
초기 조직이 안정되고 사업에 가속이 붙으면서 그는 다시 1990년 3월 설비계획본부 부본부장을 거쳐 광양제철소 정비본부장이 되었다. 2년 후 1992년에는 같은 자리에서 임원에 올랐고 1994년 포스콘 상무이사로 자리를 옮긴 후 8년 동안 전무, 사장을 거쳤다.
포스콘에 근무하면서 2001년 사장 시절 인천국제공항 수하물 배송 시스템을 완성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것은 전기, 전자도 아닌 하나의 개념으로서 인천공항이 연속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선정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세상에 필연적 사고는 없다··· 정비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성
“1985년경을 되돌아보면 비록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포항제철소에 큰 사고가 무척 많았습니다. 강편공장 화재, 2변전소 화재, 냉연공장 화재 등이 잇달아 일어났어요. 그때마다 포항제철소 이름으로 복구반이 만들어졌고 거의 대부분 복구반에 참여했습니다. 반장도 더러 맡았어요. 전기사고는 제철소를 깜깜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그 모든 일들이 절대 필연적인 사고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든 너무 쉽게 하려고 하면 그런 엄청난 일들이 터질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오랜 동안 설비를 움직이는 기계·전기하고만 일해 왔다고 회고했다. 기계, 전기 이런 것들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그걸 움직이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2001년이었습니다. 광양 산소공장에 계속 사고가 일어났어요. 공학 책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사람 짓이었습니다. 전기쟁이로서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일로서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실수나 태만이 일으킨 일이었다면 그나마 좀 낫겠지만, 스스로가 움직이는 설비에 일부러 고장을 내고 다녔으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일이겠어요.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술자든 공무원이든 행정가든 자기의 전공 분야보다는 인성이 먼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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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7월 임직원들이 조업을 시작한지 한 달이 채 안된 포항제철소 중후판공장에서 발생한 변압기 사고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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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제철소 소장단과 부장단이 1993년 설비관리센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다섯번째부터 황원철 설비관리부소장, 김권식 제철소장, 최휘철 정비본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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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7월 24일 故김수환 추기경(오른쪽) 일행이 광양제철소에 방문해 최휘철 당시 포스콘 사장(왼쪽)이 제철소 현장을 안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