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우가 포스코에 사업의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7년이었다. 2년 전인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연합철강(現 동국제강)에 스킨패스유(Skin Pass Oil)와 압연유(壓延油) 공급에 성공한 후 현대자동차에 프레스 윤활방청유, 일신제강(現 동부제철)에 특수 파이프용 방청유를 개발, 공급함으로써 자동차, 철강 업계와 인연을 맺은 뒤 그 실적을 바탕으로 1977년 포스코 압연공장에서 사용하는 조질압연유를 공급한 것이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포스코와 10여 차례 성능 실험한 끝에 국내 최초로 압연유 개발 성공
– ‘안 되면 그만’ 안일함 안 통하는 포스코 기업문화 본받아 체질 바꿔
– 연구소 설립 등 기술개발 주력해 국내 최대 가공유제 전문 기업으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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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가 포스코에 사업의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7년이었다. 2년 전인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연합철강(現 동국제강)에 스킨패스유(Skin Pass Oil)와 압연유(壓延油) 공급에 성공한 후 현대자동차에 프레스 윤활방청유, 일신제강(現 동부제철)에 특수 파이프용 방청유를 개발, 공급함으로써 자동차, 철강 업계와 인연을 맺은 뒤 그 실적을 바탕으로 1977년 포스코 압연공장에서 사용하는 조질압연유를 공급한 것이었다. 김명원 범우연합 회장은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된 1973년 범우를 창업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포스코와 함께한 39년의 인연을 담담히 회고했다.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국민경제의 자립화 기반 구축을 기본 방향으로 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1973년 5월 10일, 미국 WD-40사로부터 한국에서의 사업권을 획득한 것이 범우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제품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로켓 조립 과정에서 발생하는 녹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된 최첨단 석유화학 제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원유 가격이 하루아침에 800%까지 치솟는 바람에 사업의 방향을 틀어야 했습니다. 그때 나는 앞으로 석유를 베이스로 하는 제품의 사업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국책사업인 중화학공업 즉, 자동차·철강·선박·기계 등의 기업군은 정부 계획대로 진행, 발전시킬 것으로 판단하고 여기에 소요되는 필수 공작 가공 유제 중 탈석유 제품이 무엇인지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철강 압연강판 생산에 소요되는 압연유, 스킨패스유 등이고, 자동차·기계산업에 필요한 수용성 절삭유(切削油) 등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정부는 무역수지 개선, 국제 경쟁력 강화의 일환으로 주요 수입 자재의 국산화를 정부 시책으로 강력히 독려하고 있었다. 철강업계에서는 압연유, 방청유 등이 국산화해야 할 품목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당시 포스코는 엄청난 내외자를 동원해 건설한 제철설비에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쳐 객관적으로 품질이 인증된 자재가 아니면 함부로 적용하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해도 국내 산업 전반에서 국산 자재는 싸구려 또는 모조품이라는 인식이 강해 포스코에서도 범우가 개발한 국산화 제품을 선뜻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제품의 품질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품질 압연유를 현장에 적용했을 때 강판의 품질 저하로 발생할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제품만 쓴다는 것이 포스코의 원칙이었다.
“이런 까닭에 범우는 정부 주관부처인 동력자원부로부터 고속 박판용 냉간압연유에 대한 ‘국산화 소견서’를 받아와 포스코를 설득해야 했고, 이 제품을 다시 압연 현장에 적용해 이상 유무를 살피는 테스트를 1년 동안 지켜봐야 했습니다. 테스트 결과가 포스코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면 범우는 포스코 압연유 공급사로 결정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포스코 현장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 포항 1냉연공장은 압연기 1기당 압연유 사용량이 월 200드럼 정도였고, 범우 인천공장의 초기 압연유 생산능력이 월 1000드럼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우로서는 대단히 큰 물량이었습니다.”
높은 리스크 감수하고 포스코와 ‘압연유 국산화’ 성공시켜
개발하고 보니 우리 압연유가 일본 제품보다 품질 뛰어나
범우는 포스코 냉연부에 사용 가능성 검토를 의뢰했고, 포스코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포스코 냉연부 직원들과 범우 연구원들이 합동으로 한국과 일본의 연구실험소에서 11차에 걸쳐 성능 실험을 실시한 결과 사용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때 포스코 냉연부는 기술성능은 물론 공급가격 등 경제성까지 면밀히 검토한 결과를 고위층에 보고했다. 그러나 포스코는 매우 신중했다. 박득표 포항제철소장은 범우의 책임자가 직접 와서 설명해줄 것을 요청해했다. 김명원 회장은 박득표 소장을 찾아가 저간의 개발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박득표 소장은 범우의 유제를 사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책임 즉, 기술적 책임은 물론 경제적 책임까지도 감수할 자신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다시 한번 심사숙고하고 자신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으로 백지 당좌수표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냉연부에서 재확인을 거쳐 범우에 통보할 것이라고 했다.
“1983년 11월 실험 스케줄을 잡자고 포항제철 냉연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막대한 리스크를 안고 국산 압연유를 실제 압연기에서 실험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단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당시 대한민국에 유일했던 일관제철소의 조업 조건은 다양하고 까다로웠어요. 당시는 분당 1000m의 압연 속도로 0.2mm의 강판에서부터 후물까지, 다양한 강종을 같은 라인에서 생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만일 잘못되었을 경우 포스코나 범우나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포스코의 입장에서는 냉연공장의 계속적인 증설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일본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기술을 확립해야 했으므로 국내 전문업체의 양성이 절실했다. 일본 자재 메이커의 고가 공급 정책 또한 국내 자재 개발을 재촉했다. 게다가 포스코 자체기술의 외국 유출 방지, 중소기업 육성이란 정부 시책 부응 및 무역수지 개선,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요 자재의 국산화 필요성 등도 포스코가 리스크를 무릅쓰고 자재 국산화의 결심을 굳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양사 기술진의 자존심도 대단했습니다. 추측건대 포스코 최고경영층의 결단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결단은 아무나 내릴 수 없는 것이거든요. 드디어 12월 들어 제품 테스트 일정이 잡힌 뒤 포항제철 냉연부와 범우 압연유팀 전원의 합동 캠프가 설치되고 본 테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는 안정준 당시 냉연부장과 함께 작업 현장으로 갔다. 안 부장은 엔지니어 특유의 직설적인 어조로 물었다.
-지금 테스트하는 압연유가 진정 문제가 없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안 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잘못 되었을 경우 범우는 백지수표로 경제적인 손실만 보지만, 우리 압연부 전 직원은 인생이 끝나는 것이오. 뿐만 아니라 포스코의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오.
김명원 회장은 뒷날 그때처럼 당황해 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김 회장이 말을 받았다.
-우리도 경제적 손실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10년간 우리 연구진이 피나는 노력으로 개발한 제품입니다. 저는 저희 기술을 믿습니다.
“몇 시간 후 실험이 정상적으로 마무리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포스코의 기업정신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안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철저히 배제한 가운데 확신이 생겨야만 작업에 들어가는 그 정신 말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범우 직원들은 포스코 요원의 한 사람으로 동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일본 압연업계에서는 그 테스트가 반드시 실패할 것으로 단정했다는 겁니다. 이 테스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기화로 이후 독일에서 수입해 써온 전기강판 압연유와 또 다른 수입 제품이었던 방청유의 국산화까지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때 실패했다면 포스코의 국산 압연유 사용은 10년 이상 늦어졌을 겁니다.”
포스코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온 범우의 역사··
국내 철강산업 고속성장 계기로 범우도 전환점 맞아
만족스러운 테스트 결과는 자연스럽게 범우의 납품사 결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포스코 1냉연 압연유 공급이 재정적 측면에서는 물론 생산량 측면에서도 범우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월 180드럼 이상의 압연유 공급을 계기로 범우의 매출은 급격히 증가했고. 매출 급증이 거래금액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당시 주거래은행의 행장이 직접 회사로 찾아와 인사할 정도로 은행 대접도 달라졌다.
“1983년, 포항제철 1냉연공장에 범우가 국산화한 고속 박판용 냉간압연유의 공급을 개시함으로써 압연유 판로 확장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포스코와 범우가 더욱 긴밀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징검다리로서의 의미가 크지만, 해당 제품의 초도 납품이 결정되기까지의 1년 세월은 범우 경영진과 기술진에게는 피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도 납품이 이루어지던 날 10톤 트럭이 꽉 차도록 제품을 싣고 포항으로 떠나던 당시 민주식 영업본부장, 최대영 기술과장, 그리고 김인수 소장, 세 사람의 얼굴에 피어났던 자랑스러운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압연유 시장도 다른 유제와 마찬가지로 가공 소재에 따라 철강 분야와 비철 분야로 나뉘는데, 범우는 시장 규모가 큰 철강 쪽에 집중해 왔다. 범우가 제품 공급, 공동 개발 등 협력 관계를 확대해온 대상은 국내 굴지의 철강사들로 1980년대 후반 이후 범우가 압연유 분야에서 이룩한 기술력 발전은 사실상 국내 철강업을 선도하던 포스코의 생산현장 상황에 대응하는 궤적을 그려왔다. 특히 광양제철소 건설은 전후방효과에 따른 관련산업 성장을 견인함으로써 범우의 안정적인 성장을 떠받치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먼저 국내 철강산업 태동기였던 1976년 조질압연유 개발, 1978년 국내 최초 냉간압연유 개발, 공급 등 현안 제품을 개발해 철강제품 품질 안정화에 기여한 사례는 범우 기술력 발전의 출발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1982년, 냉연강판용 방청유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적용하기 시작했고, 1983년에는 고속박판 냉간압연유를 개발해 포항 1냉연공장에 적용함으로써 냉연강판 품질 제고와 원가 절감에 이바지한 바 있습니다.”
압연유 분야의 성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 철강산업의 고속 성장과 더불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87년부터 5년 동안 광양제철소 건설을 통해 3개 냉연라인이 거의 1년 간격으로 연이어 증설, 확충되면서 압연유의 수요가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한편, 수요가는 제품의 고기능화, 고품질화를 추구하는 등 압연유 분야에서도 질적 변화가 요구되었다. 1987년 5월에는 광양 1, 2냉연에 동식물 유지(油脂) 베이스 압연유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범우가 국산화한 전기강판 압연유를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수입대체 효과를 포스코와 공유했다.
“압연 라인은 설비가 같은 종류라도 각각의 용도와 필요에 따라 제반 기능이 달라지고, 압연유 역시 그 차이에 따라 설비마다 배합 조성이 달라져야 합니다. 압연 라인의 안정화는 곧 현장설비에 대한 압연유의 최적화를 의미하며, 범우 기술진이 수행하던 그 최적화 작업은 고품질, 다기능화를 추구하는 고객사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 좋은 사례가 1991년 분산형 압연유를 개발해 포항 2냉연공장에 적용하고 이듬해인 1992년에 초고속 극박 압연유를 개발해 광양 3냉연공장에 적용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고품질 제품 지속 개발해 고객 경쟁력 향상 지원에 박차
원가 절감 및 생산성 향상에 기여··· 범우-포스코 ‘윈윈 효과’
범우는 1995년 4월 특허청으로부터 범우기술연구소와 포스코 산하 연구소인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이 공동으로 개발한 윤활성과 밀클린성을 겸비한 박판냉간압연유의 특허를 획득했다. 이 박판냉간압연유는 범우와 RIST가 공동으로 연구하여 1992년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윤활성과 밀클린성뿐만 아니라 친환경 기능까지 두루 갖춘 차세대형 압연유로 평가받았다.
“박판냉간압연유를 개발했을 때 철강업계에서 크게 환영한 이유가 있었지요. 기존 압연유는 베이스오일에 따라 윤활성이 좋은 제품과 밀클린성이 좋은 제품으로 구분하여 강판 제조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윤활성과 밀클린성이 상반된 성질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어 이 둘을 동시에 구현하지 못했는데, 박판냉간압연유가 개발됨에 따라 품질 제고, 생산성 향상, 원가 절감 효과가 뚜렷이 나타난 겁니다. 초극박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불량률도 현저히 낮출 수 있었던 거지요. 포스코는 이 제품을 일부 냉연라인에 적용해, 월 생산량을 사용 전보다 8.7% 가량 늘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범우가 RIST와 함께 1999년 9월 개발한 고속냉간압연유는 1995년의 박판냉간압연유보다 기능 면에서 한 단계 진화한 제품이었다. 이는 자동차산업, 전자산업에서 요구하는 강판 소재의 고압화, 고강도화, 극박화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친환경제품이었다.
“이는 범우와 RIST가 3년간의 공동연구 끝에 개발한 제품이었습니다. 신제품을 평가하는 방법이나 기준이 국내에서는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고, 외국 사례 또한 명확하지 않아 개발 인력이나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포스코와의 산학협력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돌파구가 되었어요. 범우는 이 고속냉간압연유로 산학협력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1999년 11월 열린 산학협력대회에서 산업협력재단 이사장 표창을 받았습니다.”
2000년 3월 범우는 포스코와 공동으로 초극박용 압연유(SYNROL 500K)를 개발하여 현장에 적용했다. 이는 기존 제품보다 내오염성과 윤활성이 더욱 향상된 제품으로 특히 압연작업 때의 경계윤활성을 더욱 높임으로써 작업성 개선과 함께 품질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한 점이 특징이었다. 이를 광양제철소 압연설비에 적용한 결과 압연 온도를 기존보다 더 낮춘 저온 압연이 가능해졌고 생산성은 8% 향상됐으며, 평균 압연속도는 5.7% 향상됐다. 스피드업 달성률도 4.3% 향상됐다.
범우는 일찍부터 적극적인 상생협력을 실천하고, 고객사의 경쟁력 향상을 지원함으로써 대기업과 공존공영(共存共榮)하는 경영을 펼쳐왔다. 범우의 상생협력 경영이 포스코의 성과공유제 시행과 맞물리면서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포스코는 2004년 성과공유제를 처음 시행하면서 범우를 비롯한 많은 협력사를 성과공유의 동반자로 받아들였다. 성과공유제란 대기업이 협력사와 공동으로 공정개선이나 신기술 개발을 추진해 거둔 성과를 나누는 제도로서, 포스코는 중소기업과 공동으로 혁신과제를 발굴해 현금 보상, 단가 보상, 장기 공급권 제공 등으로 보상해 주었다. 공동개발 과제가 성공하지 못해도 참여한 협력사에 연구개발비를 보상했다. 범우는 포스코가 성과공유제를 도입할 때부터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큰 성과를 거둬왔다.
“저희 범우와 포스코는 2004년 포스코 1냉연 압연윤활성 최적화 과제를 시작으로 꾸준히 개선과제를 진행해 2010년까지 10건의 프로젝트를 완료했습니다. 7건은 연간 13억 3600만 원의 재무효과를, 나머지 3건은 연간 7~8억 원의 재무효과를 거둔 것으로 포스코는 평가했습니다. 범우는 2009년 슈퍼클린 압연유 개발 과제를 성공리에 완료함으로써 성과 기여분인 6억 2400만 원의 현금을 포스코로부터 일시금으로 받으면서 3년 장기계약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윤활성과 정화능력 뛰어난 ‘슈퍼클린 압연유’ 개발 성공
포스코의 무결점·고품질 냉연강판 생산체제 구축에 기여
자동차강판은 포스코 주력 제품 중 하나다. 포스코는 2003년과 2004년 각각 포스코차이나와 포스코재팬을 설립하는데 이어, 2005년에는 인도에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면서 글로벌 경영 확대 행보를 이어왔다. 그러는 가운데, 2006년에는 광양제철소에 6CGL(용융아연도금공장)을 준공하며 자동차강판 650만 톤 생산체제 구축을 통한 세계 자동차강판 시장 선도에 주력하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 미국 시장을 석권하면서 세계 자동차강판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한 포스코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인 일본 도요타자동차에 고품질 강판을 수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기존의 포스코 제품은 품질 검사가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도요타의 요구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자동차 외판재로 쓰이는 강판은 재질 못지않게 표면 품질이 중요하다. 자동차 외관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표면 품질을 결정짓는 공정이 바로 압연 라인이다보니, 포스코는 압연 품질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강판 품질력 개선이 관건이었고, 이를 위해 범우연구소에 고청정 기능의 압연유 개발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2007년 4월 범우연구소는 신개념 냉간압연유 개발 프로젝트를 끌고 갈 TFT를 구성했습니다. 슈퍼클린 압연유 연구개발 과정에서 가장 지난했던 작업은 역시 윤활 성능의 최적화였어요. 이 과정은 연구원들이 연구개발의 첫 번째 관문으로 받아들일 만큼 지구력과 인내력을 요구했습니다. 어느 배합이 적정 비율인지 찾아내기 위해 표본 테스트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결과치를 비교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압연 중에 롤과 강재와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윤활성 테스트란 최적의 마찰계수를 찾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윤활성 최적화를 위해 그동안 원가 때문에 제품화한 적이 없는 고가 원료까지 투입했습니다. 원가 상승 우려는 이미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 있었던 거지요. 그렇게 하여 가장 좋은 윤활성을 발휘하는 최적 원료의 적정 비율을 찾았지만, 연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윤활성 테스트라는 산을 넘으니 강판 오염도 문제라는 또 다른 산이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관문이었어요.”
강판 오염도는 압연유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소다. 통상적으로 압연설비를 깨끗이 청소해도 압연유를 투입한 뒤 잠시 동안은 압연유가 혼탁해진다. 기계에 남아있던 오염 물질이 흘러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탁해졌던 압연유는 대부분의 경우 이내 맑은 우윳빛으로 되돌아온다. 압연유의 세정능력이 혼탁한 오염물을 정화하는 것이다. 압연유의 정화능력이 좋을수록 정화 시간이 단축되면서 강판 오염은 줄어든다. 그런데 윤활성 테스트를 마친 압연유 시액에 오염물을 부어 관찰했지만 강판 오염도는 기존 압연유 수치보다 더 줄어들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아예 연구실에서 살 각오로 대들었다. 슈퍼클린 압연유를 현장 설비에 투입해 검증하는 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압연유 혼탁도를 개선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현장 검증 2주를 남겨두었다. 성공 여부는 포스코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현장검증 일주일 전, 그간 꼼짝하지 않던 강판 오염도가 차츰 감소하더니 기존 제품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어요. 마지막 테스트에서는 불순물을 투입해도 압연유 본래의 맑은 우윳빛을 유지했습니다. 드디어 기대한 세정능력 수준에 도달한 것이었는데, 현장 검증을 통과하기 전에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이 세 번째 관문은 시제품 생산이었어요. 제품의 배합 레시피를 공장으로 보내 시제품 생산에 들어갔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돌발사고가 발생한 것은 시제품 생산을 마친 뒤였습니다. 원액을 살펴보니 원액이 맑지 않은 겁니다. 본래의 맑은 갈색 빛깔을 잃고 혼탁했어요. 원인을 파악해 보니 품질관리나 제조공정에는 문제가 없었으므로 결국 설계 오류로 결론 내렸지요. 설계의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 TF팀 요원들 정말 고생했습니다.”
드디어 현장검증의 그날이 왔다.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입한 슈퍼클린 압연유 개발 프로젝트가 시험대에 올랐다. 포스코 압연 현장에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압연공정이 시작되고, 잠시 후 새로 개발한 슈퍼클린 압연유가 투입됐다. 관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설비를 가동한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압연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포스코는 이 슈퍼클린 압연유를 활용, 광양제철소의 무결점, 고품질 냉연강판 생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다시 도약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40년의 세월 동안 포스코와 동반자 관계를 이어오면서 매번 감탄하는 것은 포스코의 ‘지치지 않는 정신력’입니다. 목표를 항상 150% 정도로 잡기에 100% 달성을 위한 양보치를 50% 정도 두는 것이겠지 생각했는데, 결국은 150% 전부를 이루어내는 그 정신이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거래 관계에 있는 업체들도 어언간에 그런 정신에 동화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제2, 제3의 도약은 포스코에 이미 약속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1960년대 중반 김명원 회장은 대학시절 전공했던 화학공학 분야와 관련이 있는 특수 방청윤활유제의 쓰임새를 인식하고, 사업 가능성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후 1973년 5월, 그는 범우를 설립하고 국내 최대 규모의 방청유 기업을 일궈냈다. 했다. 범우 설립 초창기인 1975년, 인천 효성동 공장 부지 앞에서 김명원 회장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김명원 회장은 1973년 범우 설립 즈음, 미국 로켓케미컬 사로부터 방청제 WD-40의 수입판매권을 확보해 국내에서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김명원 회장이 미국의 WD-40 본사에서 잭 배리(Jack Barry) 사장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범우는 1980년대 후반, 국내 철강산업의 고속성장과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87년부터 광양제철소의 냉연라인 3개가 연이어 증설·확충된 것을 계기로 범우와 포스코 양사는 기술적인 협력을 통해 동식물유지 베이스 압연유, 전기강판 압연유 등을 국산화하고 현장에 적용하며 수입대체 효과를 공유했다. 1992년 김명원 회장(앞줄 제일 왼쪽)이 광양제철소 직원들과 업무 협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