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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81] 김광호 前 상임감사, 종아리 퉁퉁 붓도록 재무부·금융기관 찾아다닌 끝에 부도 막아

[남기고싶은이야기 81] 김광호 前 상임감사, 종아리 퉁퉁 붓도록 재무부·금융기관 찾아다닌 끝에 부도 막아

2016/12/21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은 선조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된 국민 자산인 만큼 언젠가는 국민에게 되돌려드려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은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된 1987년 6월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88년 2월까지 기업공개를 위한 특별작업에 들어갔다. “초기 실무 작업은 나와 곽무남 당시 관리부장 두 사람이 수행했습니다. 정부 지분을 증시에 상장하는 만큼 자본시장육성법 등 법률적으로 검토해야 할 일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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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입사 후 줄곧 자금 담당··· 광양제철소 건설자금 자급자족하고자 고군분투
– 기업공개 이끌어··· 한국 증권가의 상징 포철 국민주 상장 “대성공” 큰 보람
– 원가계산 전산화 시스템 마련해 회계·결산 투명화 바람 선도하기도

 

김광호 전 상임감사 주요 경력  1943 일본 나고야 출생  1966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66 호남비료 입사  1969 포스코 입사 기획관리부, 자금부 원가과장, 재무과장 자금부 차장 자금부장, 관리실 부장 관리이사보  1988 제철판매(現 포스코 P&S) 부사장  1989 포스코 상임감사  1992 제철학원 및 제철장학회 전무이사  1995 포철산기 부사장  1997 포스데이타 사장  2005 포스데이타 사장대우 상임고문  상훈 1973 재무부장관 표창  1987 '조세의날' 산업포장  2002 동탑산업훈장(한국 소프트웨어 산업발전 공로)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은 선조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된 국민 자산인 만큼 언젠가는 국민에게 되돌려드려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은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된 1987년 6월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88년 2월까지 기업공개를 위한 특별작업에 들어갔다.

“초기 실무 작업은 나와 곽무남 당시 관리부장 두 사람이 수행했습니다. 정부 지분을 증시에 상장하는 만큼 자본시장육성법 등 법률적으로 검토해야 할 일도 많고, 아예 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도 있었는데 모두 낯선 일들이었어요. 박태준 회장께서는 포항제철이 나가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 주셨고 박득표 당시 부사장님께서 실무적인 지도를 해주셨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너무 복잡한 일이 많아 매일 밤늦게까지 일에 파묻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날도 밤을 하얗게 새우고 밥도 못 먹은 상태였는데, 김덕윤 비서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의 성화가 대단하니 빨리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벌써 네 번째 독촉이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나겠다고 귀띔해 주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서울 명동의 KAL빌딩 신관 7층 회장 집무실로 갔다.

“보고는 내가 드리고 박득표 부사장님과 곽무남 부장이 배석했는데, 보고 도중 회장님께서 호통을 치셨어요. 일을 추진하는 절차나 방법 등 실무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민주 방식의 기업공개라는 민족사적 의미와 당신의 경영철학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보고 중간중간에 또박또박 힘주어 멘트를 하시면서 곽 부장에게 그대로 복창하라고 하셨어요.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구나, 이거 큰일 났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곽 부장이 회장님의 멘트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마치 말씀을 녹음한 듯이 그대로 복창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보고를 받으셨어요.”

밤낮없이 일한 끝에 박태준 회장 염원이었던 증권시장 제1호 국민주로 상장

국민주 방식의 기업공개라는 객관적 절차를 밟기 위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3개 대학 경영대학원장의 지도 아래 기업공개의 큰 방향을 잡고 틀을 짜나갔다. 1988년 6월 10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주식이 증권시장에 상장되자, 포항제철의 주식은 단번에 한국 증권가의 상징적 주식이 되었고 한때는 삼성전자보다 높은 주당 70만 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상장 작업을 마친 3월 초, 내 영혼의 거처와도 같은 포항제철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밤을 낮 삼아 상장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상장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당사자였지만, 나는 우리사주도 배정받지 못 했습니다. 이는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아 놓은 일이었어요. 일평생 살아오면서 겪은 가장 서운한 일로서 가슴에 맺힌 한을 오랫동안 내려놓지 못했어요. 고준식 사장님이나 황경노 상무님이 계셨더라면 절대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누가 나를 왜 이렇게 짓밟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이후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1988년 2월 주주총회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박태준 회장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포항 집무실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었다. 미국에 가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집안 사정으로 해외 근무가 어려운 여건이었으므로 포항제철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가라는 것은 사실상 내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다음날, 그러니까 삼일절 새벽에 마음도 달랠 겸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서 양산 통도사로 갔습니다. 3월이었지만 날씨가 매섭게 추웠어요.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와 눈을 조금 붙여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 누웠는데, 영일대에서 회장님이 찾으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박태준 회장께서는 영일대 라운드테이블에 앉아 계셨는데, 내 심경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내가 눈을 감을 때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내 인생을 평가하려고 한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시점에서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하느냐? 너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박태준 회장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포항에 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 민족적 대 역사를 맡길 인물을 고른 끝에 나를 택하셨다. 나는 그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주위에서 박태준이 대통령의 뜻에 따라 제철소를 건설한다고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우리나라가 돈이 있나, 기술이 있나, 인력이 있나, 어느 한 가지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허허벌판 갯벌에 무슨 제철소냐. 불가능한 일이다고 하면서, 그러면 박태준은 그 사람의 성격상 스스로 영일만에 뛰어들어 죽을 사람이라고들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포항제철을 일궈내지 않았느냐. 분명 실패할 것이라는 국내외의 회의와 비관을 극복하고 세계가 놀라는 신화를 이룩하지 않았느냐?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광호 전 상임감사는 일전에 조말수 전 사장이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나눈 대화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말수 비서실장이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김광호 당신, 이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으냐고. 그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포항제철에 들어와 일하겠다고···. 그 말은 공명심에서 한 말이 아니라 저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 그런 네가 왜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을 하느냐.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회사를 떠나겠다는 그의 생각은 결국 제철판매 부사장으로 부임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제철판매는 1976년 포스코의 자회사로 설립된 뒤 타인에게 양도되었다가 포스코가 재인수한 철강재 전문 판매회사로서 이후 상호가 ‘포스틸’로 다시 ‘포스코 P&S’로 바뀌었다. 그런데 1988년 3월 그가 부임하고 나서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세무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 본사와 사업소가 있는 포항, 광양 3개 지역에 대형 버스가 동시에 들이닥쳐 눈에 보이는 서류는 몽땅 쓸어갔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쓰는 수첩까지도 압수해 갔어요. 몇 개월 동안 정말 세무조사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독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 결과 탈세나 부정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사찰단들도 포스코가 부정을 저지르는 회사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어요. 다만 한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남 이창석 씨가 인수했다가 다시 반환한 일이 있었으므로 거기에 무슨 배경이 있었는지를 캐는 것 같았습니다.”

세무조사를 받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1년이 후딱 지나가버리고 새해가 밝았다. 포스코의 1989년 신년 인사회에 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제일 마지막으로 하례식장에 들어갔다. 박태준 회장은 지난 1년 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솟구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지영학 제철판매 사장이 박태준 회장이 찾는다고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회장님을 찾아뵈었더니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거야. 나를 다시 포스코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이 말이 새나가면 못 들어온다면서 박득표 부사장도 알면 안 된다는 거였어요. 3월에 주주총회가 열렸는데, 회장님 말씀대로 조심하느라고 비행기도 포항행이 아닌 울산행을 탔어요. 주주총회장 앞에서 박득표 부사장과 마주쳤는데, 의외라는 듯 ‘네가 여기 왜 왔어? 하고 물으셨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주총에서 나는 포스코 상임감사로 발탁되었습니다. 1년 만의 포스코 복귀였어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포항제철소 가동 앞두고 원가계산 전산화 시스템 구축 이끌어···

수작업으로 주판 두드려 일주일 넘게 걸리던 작업시간, 획기적으로 단축

김광호 전 상임감사는 196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호남비료에서 근무하던 중, 포항제철의 경력사원 모집에 응시하여 1969년 6월 포스코에 합류했다. 그의 뇌리에는 당시 면접위원 세 분의 질문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황경노 관리부장은 ‘기획과 계획을 설명해 보라’고 했고, 안병화 업무부장은 ‘옵티미즘(optimism·낙관주의)과 페시미즘(pessimism·비관주의)이 뭐냐’고 물으신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최정렬 총무부장은 ‘비료 가루 만지다가 쇳가루 만져보겠어’ 하시면서 뚫어지게 바라보셨어요. 면접위원들과 5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앉은 좀 무섭게 보이는 분이 학교 전공 관련 한두 가지를 물어보셨는데, 그분이 고준식 당시 전무이사였습니다. 거의 50년이 지난 일이나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입사하자마자 휴일은커녕 밤낮도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외국 차관 등 제철소 건설자금이 조달되고 나서는 월별, 연도별 차관원리금 상환 계획을 수작업으로 작성했는데, 숫자의 단위는 크고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이라 휴대용 칼큘레이터보다 주산으로 계산하는 것이 더 빨랐다. 당시는 초중고 과정에서 주산을 가르쳤는데, 주산을 열심히 익힌 것이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1974년 초봄이었어요. 당시 정부에서는 포항제철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제2제철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이홍종 상임감사와 황경노 상무이사가 상공부장관을 만나고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김광호 너 제2제철에서 달라는데,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계속 근무하고 싶으니 승진이나 빨리 시켜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윤모 과장께서 삼정강업 부사장으로 가시면서 같은 날 나는 포항제철소 원가과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32세 과장이니 꽤 빠른 편이었어요. 포항으로 내려가 보니 급선무가 포항제철소 가동에 대비한 원가계산 전산화였어요.”

당시 박태준 사장은 매월 15일 운영회의를 주재했는데, 제철소 각 공장의 원부자재 등 원재료 투입 원단위를 체크하는 한편 제선, 제강, 압연 등 단계별, 공장별 원가를 따졌다. 원가가 오른 제품은 명확하게 이유를 밝히지 못하면 해당 공장장은 혼쭐이 났다. 월례회의를 15일에 한 것은 원가계산을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아무리 앞당기려 해도 그 이상 앞당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월례회의가 가까워 오면 매월 비상이 걸렸다. 시간을 줄이는 방법은 전산화밖에 없었다.

“전산화 이전에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상고(商高), 이를테면 서울상고, 부산상고, 군산상고, 벌교상고 출신의 주산 고단자 12명이 일주일 이상 밤낮으로 계산을 해야 공정별, 공장별, 제품별 원가계산서가 나왔습니다. 원가계산 전산화를 위해 전산실에서 많은 밤을 새워야 했지만 나는 그 일이 즐거웠어요. 수작업 시에는 각 공장에서 필요에 따라 숫자를 임의로 조정하기도 했으나 전산화 이후에는 ‘꼼짝 마라’였습니다.”

1976년 8월부터 1981년 3월까지 약 5년간 그는 자금부 재무과장, 자금부차장, 자금부장으로 자금부에서 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이 기간 중 정부는 국내 철강공급의 부족을 예상하고 제2제철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실수요자와 입지 선정을 두고 오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1978년 포항제철의 제2공장으로 건설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뒤 1981년 제철소 입지는 아산만에서 광양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포항제철소는 대일청구권자금 등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광양제철소는 포항제철이 자체 자금으로 건설하는 것으로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재정이 어려웠습니다. 조선, 철도, 고속도로, 새마을운동 등 국가의 전 분야에서 투자 소요가 증대되고 있었으므로 국고가 넉넉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박태준 회장님의 결심은 매우 단단했습니다. 그때부터 포항제철은 내부적으로 마른 수건도 다시 짜는 초긴축 경영을 이어갔습니다.”

각종 철강제품의 원가계산 전산화가 마무리되었을 무렵, 황경노 당시 상무이사가 컴퓨터로 출력한 원가계산서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수백 쪽에 이르는 원가계산서를 안고 가니, 서울에서 격려차 포항에 내려와 차를 나누고 있던 상공부 전계묵 제철과장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그날 이후 컴퓨터에 의한 회계장부의 투명화는 재계의 큰 이슈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해 후인 1985년 11월, 안무혁 국세청장이 이 사실을 알고 1차로 30대 재벌의 오너, 2차로 50대 기업의 대표이사들로 하여금 포항제철을 견학케 하고 대기업의 회계, 결산 투명화를 선도하기도 했다.

“1976년 8월 포항 원가과장에서 다시 서울 자금부 재무과장으로 올라갔는데, 그때가 전 세계적으로 자금관리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각국 기업의 수출입 업무가 증대됨에 따라 외국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면서 달러화, 도이치화, 엔화 등 주요 통화의 환헤징 기술이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자금이 생기면 안전하게 은행에 예치하고, 부족하면 은행 대출을 받아 운영하는 체제였는데, 그때부턴 돈 자체를 이익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면서 환딜링 등 자금운용을 기업 이익 증대의 중요수단으로 삼은 것이었어요.”

이 무렵 고준식 부사장은 그를 불러 해외에 나가 금융시장의 변화를 파악해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명령을 받들어 일본과 독일 시장을 살펴보겠다고 했으나 고 부사장은 일본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배울 것이 많은 나라이고, 미국은 세계 기축통화국이니 그 두 나라를 다녀오라고 했다. 미국 연수 중 뉴욕 월가에서 한국 통화가 평가절하된다는 소문이 나돌아 정윤종 자금부장에게 전화보고를 하면서 그는 해외연수 중에 자금부 차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포스코 역사 최초로 해외서 운영자금 조달해 ‘170억 엔’ 마련 성공···

돈 구하기 힘들어 피 마르던 시절, 융자 얻으러 매일 금융기관으로 출근

“국내 자금에 의존해서는 포스코의 자금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나와 있는 일본 후지은행 한국지점장과 자금 문제를 상의하던 중 세계 각국의 통화가 거래되는 홍콩 자금시장에서 포스코 운영자금을 조달해 보자는 구상을 하게 됐습니다. 1987년 8월, 홍콩에 진출해 있는 20여 개 금융회사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일화(日貨) 170억 엔을 사모 형식으로 조달했습니다. 포스코 최초의 해외 조달 운영자금이었는데, 해외 광산 투자금으로 즉시 인출되었어요. 자금을 조달해온 사람보다도 사용부서가 쏜살같이 가져간 거지. 아무튼 돈 가뭄에 단비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자금 운용에 여유가 있을 때는 대출을 잘해 주다가도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면 대출은커녕 꾸어준 돈부터 빨리 갚으라고 독촉하는 것이 금융기관의 생리였다. 아침에 출근하면 양익수 자금부장과 함께 은행 융자를 얻으러 다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광교에 있는 조흥은행 본점부터 명동 입구에 있는 신탁은행, 길 건너 한일은행, KAL빌딩 네거리에 있는 상업은행, 그리고 길 건너 대각선에 위치한 제일은행 등을 쏘다니다 사무실에 돌아오면 종아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포스코는 결국 일체의 대외 지불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포스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죠.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갔는데, 1만 원 이하만 지불하는 방침을 세웠을 때가 최악이었어요. 출납 창구의 조평구 자금과장은 고객들의 성화에 시달리다가 폐렴에 걸려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기어이 국제차관 상환일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정해진 날에 송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제 금융시장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추가 차관이 어려워지고, 차관 금리가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광양제철소 건설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어요.”

그는 무턱대고 집안 인척인 홍승환 당시 제일은행장을 찾아갔다. 초겨울의 해가 기울기 직전, 창구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은행장은 담당 상무가 외근 중이니 내일 아침에 긴급 송금(Urgent Remittance)이 되도록 하자고 했다. 은행장실을 나와 자금부 이명철 송금 담당 과장을 찾으니, 다들 빠져나간 1층 객장 대리석 기둥에 머리를 박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 그리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지 눈물이 났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양익수 부장님은 풀어 죽어 있다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셨어요. ‘부장님, 우리 부도 안 납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던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차관선에는 내일 송금한다고 연락을 했고 다음날 송금이 되었습니다.”

급한 불은 껐지만 그 후로도 꺼야 할 급한 불은 계속 이어졌고 은행 차입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아침에 출근하면 바로 재무부로 가서 경비실에서 기다리다 9시가 되면 사무실로 올라갔다. 당시 재무부 출자관리과장은 출근하면 언제나 포스코의 젊은 과장이 먼저 와 있으니, 사무관에게 저 사람 책상 하나 놓아 주라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재무부 이한구 외환국 사무관과 윤증현 국고과 사무관, 그 밖에도 이수휴재무부 차관, 이근영 세제실장, 조중형 국세청 국장 등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오늘의 포스코가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노력해주신 분들입니다. 국고국에서는 정부투자기업을 대상으로 국민투자기금을 배정했는데, 포스코는 매년 200억 원 내외의 장기, 저리의 자금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윤증현 사무관이 이번에는 포항제철에 배정하기 어렵다고 했어요. 매년 많이 가져갔으니 이젠 타 기업에도 주어야 한다는 거였죠.”

그는 고민 끝에 박태준 회장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했다. 오찬 후에는 1층 계단으로 걸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단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다짜고짜 말씀을 드렸다.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무부 국고자금을 융자받으려 하는데, 지난 수년간 포항제철이 많이 가져갔으니 이젠 다른 업체도 지원해야 한다고 합니다. 전체 300억 원 중 100억 원만이라도 배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박태준 회장은 아무 말없이 집무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또 재무부 국고과로 윤 사무관을 찾아가니, 이게 웬일인가, 300억 원 전액이 포항제철에 배정되어 있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해서 박 회장 집무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렇게도 자금 부족에 시달리다가 한숨 돌릴 즈음인 1982년 10월 그는 관리실장으로 보임되었고, 이후 1987년 2월 이사보로 승진했다. 그는 제철소 현장을 알아야 예산의 집행이나 핵심 관리 포인트를 챙길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과거 원가과장 때 제철소의 시스템과 공정 흐름을 파악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제철소에서는 에너지원으로 제품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생(副生) 가스와 석유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석유가 여러 가지 면에서 사용하기 편리했으므로 부생 가스는 경우에 따라 공중으로 방산하기도 했다. 그래서 원가계산 매뉴얼을 수정했다. 열량으로 환산하던 가스는 무단가로 사용케 하고 석유는 그대로 평가하는 체제로 바꾸니 가스 사용량이 늘었고, 이는 후에 석유파동이 닥쳤을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 해질 무렵 제철소 현장을 돌아보는데, 철관 파이프 위에서 허둥대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어요. 가까이 가보니 가스 사용량을 늘리기 위한 작업을 하다가 불이 난 것이었습니다. 어느 공장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는 공장장이었어요. 제철소에서 공장 화재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지만 일단 불은 껐고 잘해 보려다가 일어난 일이기에 나만 눈을 감으면 될 일이다 싶어 그걸로 사안을 종료한 일이 있습니다. 만약 상부에 보고되었다면 나도 무사하지 못할 일이었지요.”

상임감사 재직 시, 제철소 내 여러 비위사건 감사하고 바로잡기도

사람 살아가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당연히 그늘진 곳 있기 마련···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거기가 어디든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밝은 곳이 있는가 하면 그늘진 곳도 있다는 것을 상임감사 재임 시 절감했고, 그래서 기업에 감사라는 직책을 두는 것이라면서 감사 재임 시의 일화를 몇 가지 예시했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작업과정에서 발생한 고가의 폐기물은 따로 모아서 팔아 회사의 수익으로 계상합니다. 그런데 폐전선 등을 실은 트럭에 고가의 동(銅)을 숨겨 반출한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현장에 나가 트럭에 가득 실린 짐을 모두 내려 보라고 했더니, 무슨 단체라 하면서 심한 저항과 함께 협박을 해오는 거였어요. 그런데 쏟아놓고 보니 고가의 굵은 동선(銅線)을 가득 숨겨놓았어요.”

또 다른 제보는 당시 국내에 한 대밖에 없는 장비의 가동과 관련된 일이었다. 정비 중인 장비를 작업한 것으로 했고, 동시에 두 군데서 작업한 것으로 계상한 것도 있었다. 그때 그 업체 사장은 “당신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할 거야” 하면서 협박을 가해왔지만, 부정 수령한 수 개월분의 작업비를 환수하고 감사를 종료했다.

포항제철소 모 공장의 모터가 국산 조립품인데, 일본 제품으로 속여 납품, 설치되었다는 제보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가니 포스코에도 전에 없던 일이 발생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모터를 공작정비공장으로 옮겨 사실을 파악하게 했다. 설마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조사 결과는 사실이었다.

또 그는 1990년대 초 광양제철소 부지건설이 진행되던 당시, 몇 명의 임원들과 함께 격려 차 광양에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제철소가 들어오면 청정해역인 광양만이 공업용 폐수로 오염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제철소 건설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상황이었다.

“제철소에서 방출되는 폐수는 정화 시스템을 통해 걸러진 것이므로 환경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몇 번을 말을 해도 주민들은 믿어 주지를 않더군요.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날 마침, 지역 유지들과 함께 전세버스를 타고 건설현장을 둘러볼 일이 있었습니다. 환경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다가 폐수가 바다로 흘러가는 길목에서 차를 세워달라 하고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안전모를 벗어 폐수를 퍼내 꿀꺽 꿀꺽 마셨지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박수를 치면서 그제야 우리의 말을 믿어주더군요.”

무작정 용감하게 폐수를 들이키긴 했지만 기분 탓인지 다음 날까지 속이 메스꺼운 것 같았다. 유상부 당시 전무이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특유의 웃음소리로 껄껄 웃으며 “불소가 많기는 한데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말했다. 김 전 상임감사는 이때의 일을 계기로 광양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 마음이 후련했다.

“1992년 여름이었어요. 서울의 장모님께서 별세하셔서 예광해 당시 감사부장에게 절대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서울로 갔는데, 북아현동 사모님께서 잠시 만나자고 연락해 왔습니다. 댁으로 찾아갔더니 ‘감사 때문에 잡음이 많으니 감안하라’고 하시는 거야. 잘 알겠다고 말씀 드리고 나서 ‘그러나 부정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충신은 불이 나면 화약을 짊어진 채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저를 욕하는 사람들은 불이 나면 먼저 도망갈 사람들입니다’ 하는 말로 나의 결심을 내비치고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비서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께서 사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아, 그래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씀해 주셔야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임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하고, 법률적으로 정해진 임기 중에는 고용주가 임의 해고할 수 없도록 상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그는 아무 말없이 사표를 썼다.

“그때 황경노 부회장께서 ‘김광호 감사는 중요한 사안은 제게 먼저 보고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사표를 내겠습니다’는 말로 나를 감싸 주셨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로 내 인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위로와 위안이 되었어요. 상임감사로 복귀한 지 2년 6개월 만에 다시 포스코를 떠나게 되었고, 그렇게 된 경위도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그냥 덮고 나가는 게 대의라고 판단되어 오늘날까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불행히도 그런 일과 마주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때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김광호 전 상임감사(동그라미)가 1974년 무렵 열렸던 사운영회의에 참석해 박태준 사장 앞에서 공정별 원가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모습.

▶ 김광호 전 상임감사(동그라미)가 1974년 무렵 열렸던 사운영회의에 참석해 박태준 사장 앞에서 공정별 원가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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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광호 전 상임감사(동그라미)와 일본 및 유럽계 국제은행 차관단을과 함께 있는 사진

▶ 1987년 김광호 전 상임감사(동그라미)는 일본 및 유럽계 은행을 대상으로 국제은행 차관단을 모집하여 170억 엔 규모의 운영자금을 조달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포스코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조달해온 운영자금이었는데, 돈을 구하기 어려워 애를 먹던 시기였기에 그는 계약서 사인 후 치솟는 눈물을 감추기가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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