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국제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의 조그만 찻집으로 들어선 김권식 전 광양제철소장(부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취재팀을 반겼다. 제철소장, 군대 조직으로 말하자면 야전사령관이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현장을 호령하던 지휘관의 카리스마보다는 주유천하(周遊天下)를 끝내고 돌아와 고향의 품에 안긴 노익장의 여유로움이 더 진하게 묻어났다. 제주는 그의 고향.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 제주에서 성장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전기설비 취급 설명서, 이해될 때까지 파고들어 전기분야 학습 매진
– 대전엑스포 참가, 제2이동통신사업 추진 등 신사업 분야에도 몸담아
– 만년 적자기업이었던 창원특수강 사장 맡아 1년 만에 흑자전환 기여
제주국제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의 조그만 찻집으로 들어선 김권식 전 광양제철소장(부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취재팀을 반겼다. 제철소장, 군대 조직으로 말하자면 야전사령관이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현장을 호령하던 지휘관의 카리스마보다는 주유천하(周遊天下)를 끝내고 돌아와 고향의 품에 안긴 노익장의 여유로움이 더 진하게 묻어났다. 제주는 그의 고향.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 제주에서 성장했다.
“이 찻집 바로 뒤에 내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우리집이 있습니다. 1970년 포항제철에서 보낸 입사소개서가 배달된 곳도 여기였어요. 나는 당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포항제철이 공과대학 졸업 예정자들의 주소를 파악해 이리로 소개서를 보낸 모양이었어요. 부모님께서 급히 서울 거처로 다시 보내 주셔서 열어보니 팸플릿과 함께 입사소개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지원 마감이 하루 남았기에 다음날 바로 YWCA 회관으로 가서 지원서를 냈습니다. 나는 항상 가슴속에 바다의 푸른 파도가 일렁이고 있는 사람이기에, 해안 지역인 포항으로 간다는 것이 우선 마음에 들었어요.”
1970년 3월 1일, 동기생 33명과 함께 공채 2기로 입사했다. 그러나 포항 현장에는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입사 한 달 후인 4월 1일 건설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관계 장관과 내외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포항종합제철 1기 착공식을 거행했지만, 이후로도 건설현장은 한참 동안 텅 빈 상태 그대로였다. 당시 후판공장 건설이 확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설비공급사인 오스트리아의 푀스트 사에서 파견한 슈퍼바이저들이 가끔 눈에 띄는 정도였다.
“나는 그때 후판공장의 복잡한 지하실 도면을 벽에 쭉 붙여놓고 상상을 하면서 열심히 도면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여러 장을 이어 붙여놓고 상상을 하면 마치 실제 공장이 지어진 것처럼 입체적으로 떠올랐어요. 공학도들은 도면만 가지고 입체적 모습을 즐겨 상상하는데, 아마 영화감독이 대본만으로 실제 영화 장면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리라고 생각해요.”
정비 업무 담당하면서 기계·전기·컴퓨터까지 다루는 안목 길러
다양한 업무분야 즐기면서 열심히 배워둔 것이 훗날 큰 도움 돼
그해 연말에는 일본 야하다제철소로 연수를 떠났다. 후판공정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연수는 분괴공정에서 받는 것으로 했다. 후판공정 연수를 받으려면 유럽까지 가야 했기에 가까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분괴를 택한 것이었다고 김 전 부사장은 털어놓았다. 3개월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맡은 직무가 후판기계정비 작업장이었다.
“초창기에는 대졸 사원들이 작업장을 맡았는데, 내가 1호 정비작업장이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기능직에서 작업장을 맡았고, 나중에는 직함도 주임으로 바뀌었어요. 당시 도입된 설비들은 기술력, 규모, 복잡성 등으로 볼 때 국내 기술자들이 손쉽게 다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국내 공업 수준 또한 정비에 필요한 부품 공급, 회사 외부인력 지원 등 우리회사를 충분히 서포트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도 모자라지, 외부 지원도 형편없지. 그러니 고장과 정비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어요. 한마디로 무식한 정비였지. 그렇다 보니 사람도 고생, 설비도 고생이었습니다.”
1972년 12월 공무부 제강분괴과 분괴정비계, 1973년 10월 정비설계과 기계설계계를 거쳐 1974년 7월 열연공장 압연정비계장으로 보임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는데, 계장을 맡고 보니 전기까지 알아야 했다. 기계공학과에서 강전(强電)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고, 약전(弱電), 즉 제어 분야는 아예 맛도 보지 못했기에 그야말로 그 분야에 있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나는 기계 전공이니 전기는 모르겠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두 분야를 다 파고들었는데, 특히 전기 제어에 많은 시간을 들였어요. 설비가 자동화되어 갈수록 기계와 제어를 같이 알고 이해해야 설비의 기능, 목적, 실행 정도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신속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분야의 공부는 꼭 필요했습니다.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파고 또 팠지. 공부라는 게 그렇잖아. 어느 순간 눈앞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속도가 나는 것. 결국 전기분야의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을 능숙하게 수행할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더군. 그게 나중에 컴퓨터를 공부할 때도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담이라면서 당시 설비 고장 보고 시스템도 전기 공부에 매달리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했다. 전기 분야에서 문제가 생기면 현장 엔지니어들은 지레 계장은 기계 전공이라서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전기 전공인 과장에게 바로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조직을 제대로 관리, 통제할 수 없는 거지요. 최소한 보고는 해야 하는 건데···. 아무튼 열연정비계장을 하면서 기계, 전기, 컴퓨터까지 두루 알 수 있는 종합적 안목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압연기 제어 방법이 2진법으로 되어 있었는데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시스템을 이해하고 제어카드 하나하나의 기능과 동작 요령을 공부하여 전기정비원들에게 자세히 교육했던 경험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공부란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을 즐기면서 해야 진도가 나갑니다. 나는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당시 부하 직원들에게 3급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라고 수없이 강조했습니다. 관리자가 되면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거든.”
잦은 설비 트러블로 툭하면 멈춰 서던 포항 냉연공장···
1976년 냉연정비과장 보임 후 안정적인 조업체제 구축 이끌어
1976년 공무부 공무설계과장으로 승진해 설계 업무에 매달려 있을 때 담당 차장이 부르더니 해외 선진 제철소의 냉연설비를 자세히 살펴보고 오라면서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그는 호주로 가겠다고 했다. 그는 이때 호주 최대의 제철기업인 BHP의 냉연공장을 둘러보고, 귀국 길에는 신일본제철의 냉연공장까지 방문한 후 2주 만에 귀국했다. 비서실에서는 귀국 후 첫 출근 날 사장에게 출장보고를 하라고 채근했다. 리포트를 만들어 보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구두로 해도 되니 당장 오라는 것이었다. 사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임원회의를 마치고 나온 박태준 사장이 다가왔다.
-출장 잘 다녀왔어?
-예.
-어때?
-우리나라 인구 3분의 1 정도를 호주로 이민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까지 했어? 그건 그렇고, 오늘부터 냉연정비과장으로 가.
“당시 냉연공장은 포항제철의 골칫거리 중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계속되는 설비 트러블로 가동 시간보다 휴지 시간이 더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호주로 출장을 떠날 때부터 냉연정비과장으로 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일단 예산을 충분히 달라는 청을 드렸고, 사장님으로부터 걱정하지 말라는 다짐을 받은 뒤 1977년 12월 냉연정비과장으로 갔습니다.”
“2기 설비에 포함, 건설된 냉연압연설비는 미국의 윈유나이티드사가 공급하는 등,여러 설비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공급되었습니다. 포항제철소는 대부분 일본의 설비를 도입했고, 1기 후판공장 등 몇 군데의 설비만 유럽에서 들여왔는데, 유럽 설비의 안정화 기간이 확연히 늦었습니다. 이건 기술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기술자들의 사고방식과 접근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어요. 일본인들은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 인력을 투입해 문제를 해결해 놓고 봅니다.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으로서 사고방식 등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거지요.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내용을 파악한 후 계약서상 공급사 책임인지, 설비가동 측의 책임인지부터 따집니다. 우리와는 사고방식에서부터 전혀 동질성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런 결과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냉연 정비요원들은 일주일 동안 현장에서 숙식을 하며 작업에 매달리는 것은 예사였고, 거의 한 달 동안 퇴근을 못하는 일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료가 쌓이고 유사한 사례에 대한 대처법이 매뉴얼화되면서 냉연공장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연말에는 비상 체제를 해제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조업 체제를 갖추었다.
“1978년 연말이었어요. 공장에 문제가 생겨 사흘 동안 철야를 하고 몸살이 나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김준영 본부장이 전화를 하셨어요. 설비계획부가 제2제철 설비계획 때문에 서울로 옮겨가는데, 거기로 가라는 거였습니다. 냉연공장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기에 그리로 갔습니다. 설비총괄팀 계획담당이었는데, 1년 가까이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고로를 bell-less형으로, 전로를 산소저취 형으로, 분괴형식을 완전연주 형식으로, 열연압연 폭을 1 피트로 축소하는 등 설비 계획의 근간을 바꾸는 작업을 주도적으로 했습니다. 덕분에 관련 보고서, 연구보고서, 전문서적 등을 많이 접했고 토론과 임원회의 보고에도 자주 참여했지요. 이것이 훗날 광양제철소 설비계획의 근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듬해 10월 제2제철 건설계획이 올스톱되어 설비계획팀이 다시 포항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설비관리부 설비기술실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유럽 설비공급사에 의존 않고 우리 힘으로 설비 복구에 나서다
이어서 제2분괴공장이 준공되었는데 이게 또 말썽이었다. 이 또한 유럽 설비로서 프랑스 세심(SECIM) 사가 공급한 것이었다. 결국 정상화팀이 몇 차례 구성되어 설비 정상화를 추진했으나 설비가 충분히 안정화되지 못 했다. 박근수 정비본부 부본부장이 팀장을, 그가 부팀장을 맡았다.
“문제 해결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설비 가동시간을 최대한 길게 확보하는 것이 이익이므로 해결방안을 먼저 제시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비나 인력으로 부품을 제작할 수 있을 경우에는 이를 우리가 부담하는 등 문제해결 과정에 있어 공급사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설계 팀까지 동원했지요. 설비공급사에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비용으로 빨리 복구하는 것이 책임을 따지고 있는 것보다 이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1980년 말에는 열연부, 냉연부, 후판부, 선재부 등 압연라인의 설비 전체를 관장하는 압연정비부장으로 승진했다. 1985년 광양제철소 일반설비부장으로 옮겨가기까지 약 5년 동안 포항의 전 압연라인 정비작업은 그의 손에서 순항을 이어갔다.
“광양은 포항보다 더 엄격히 관리해야 했습니다. 제강에서부터 열연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전체를 하나의 공장처럼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박태준 회장께서 광양제철소의 설비관리 방안을 작성, 보고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때 광양의 설비 특성에 맞는 관리방식을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포항 시스템을 근간으로 하여 ‘자기책임완결’이라는 사고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추상적인 내용일 수 있으나, 일을 다음으로 넘길 때에는 자신이 최대한 책임지고 완결한다는 생각으로 업무를 분담한 것이었습니다. 신뢰성 관리 등 여러 가지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 활용하고자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설비 가동 후에는 포항의 일부 전문가들이 광양의 정비관리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니 포항과 같은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의 시스템을 밀어 붙여 결국에는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많이 변화해 있겠지요.”
그는 광양 일반설비부장으로 재임한 동안 부내(部內)의 구매 업무에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하여 신뢰 구축의 기반을 마련했다. 시스템은 부내 전산요원들이 비즈니스 컴퓨터로 직접 개발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자결재 시스템을 활용하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혁신적인 시스템 도입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사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전산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그 정도의 시스템 구성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는 ‘마인드’ 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보지 않은 일,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 사람입니다. 바꾸지 않아도 잘 되고 있다는 타성에 젖어 변화를 거부하는 거지요.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로 갔다가 1993년 7월 광양제철소장으로 돌아와서는 제철소 내 모든 결재를 전자결재 시스템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때 본사에서는 광양이 너무 앞서간다면서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새로운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89년 임원으로 승진해 2년 반 남짓 광양부소장으로 있다가 1991년 9월 서울로 옮겨가야 했다. 박람회추진위원회 부위원장 겸 이동통신사업추진반 사업팀장으로 보임된 것이었다. 박람회란 대전엑스포였다. 당시 정부는 이 사업에 엄청난 공을 들였으므로 모든 대기업들이 이 사업에 상당히 많이 투자했다.
“돈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데 포스코가 250억 원정도 투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포스코가 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안 하면 안 했지, 참여한 이상 대충 하는 법이 없었지요. 부스를 현가(懸架) 시스템, 그러니까 기둥을 올려서 와이어 로프로 건물을 통째로 붙들어 매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건설했습니다. 대형 건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셈이었죠. 포스코가 철강 회사이므로, 우리 철강재의 특성과 우수성을 살리고 알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애니메이션은 프랑스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대형 영사기 2대를 활용하는 입체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당시에 입체 애니메이션을 구현한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화면에서 호랑이가 달려가면 공기 저항으로 털이 바람에 날려야 매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기능까지 구현하고 싶었지만 프랑스 기술진도 그건 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젓더군요. 당시에는 기술의 한계로 어려웠다고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2이동통신사업추진반 팀장 맡아 美 퀄컴 등과 컨소시엄 구성···
국민 모두가 포스코를 ‘대한민국 국민기업’으로 여기던 것 인상적
“이동통신사업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포스코를 중심으로 꾸려진 컨소시엄 등, 6개의 컨소시엄이 사업 참여를 위해 경쟁했습니다. 각 컨소시엄이 파트너로 영입하려고 했던 회사들의 대부분이 우리의 파트너가 될 정도로 포스코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코드분할다중접속) 원천기술 보유사인 미국의 퀄컴(Qualcomm) 사도 결국 우리 컨소시엄에 합류했는데, 그 이유가 높은 국제 신인도와 깨끗한 공익적 이미지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때 퀄컴이 수익성이나 규모 면으로 볼 때 단말기 사업이 통신 사업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으니 같이 투자하자고 비공식적으로 제안해왔으나 여러 이유로 추진하지 못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지분은 50%든 90%든 포스코가 알아서 정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파격적으로 제안해왔다고 했다.
“또, 당시 모 그룹이 임원회의에서 포스코와 다른 유력 회사를 놓고 어느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지 무기명 투표를 했는데, 포스코가 압도적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23 대 1의 결과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포스코로 가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더라는 겁니다. 그 외에도 포스코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이유와 동기 등에 대해 들으면서 포스코는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 국민기업’으로 여기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당시, 정보통신부가 요구하는 기술제안서는 디지털 기술을 전제로 했는데 거의 막바지에 아날로그 기술로 전격 변경되었다. 이는 정보통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포스코 컨소시엄에는 미국의 퀄컴 사, 퍼시픽 텔레시스 그룹(Pacific Telesis Group) 등이 참여하고 있어서 디지털 기술로 보면 6개 콘서시엄 중 제일 앞설 수밖에 없었다. 디지털 기술 제안서도 많이 진전되어 있었고, 미래에는 당연히 디지털, 특히 CDMA 기술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포스코 컨소시엄은 CDMA 기술제안서를 완성하여 아날로그 기술제안서에 첨부 제출했다. 그는 이것이 지금의 CDMA 기술 저변 확대에 조금은 이바지했을 것이라면서, 당시의 결정은 포스코다운 선택이었다고 자위했음을 회상했다.
그가 1993년 7월 전무이사 광양제철소장으로 돌아와 1997년 4월 부사장으로 승진한 뒤 만년 적자기업인 창원특수강(포스코특수강의 전신)의 제2대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1998년 3월이었다. 우선 적자 탈출이 최대의 당면 과제였다. 경영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이 이루어지면서 1년도 안 돼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이 그에게 물었다.
-흑자 만들려고 바쁘게 왔다갔다 한다면서?
-예, 흑자 만들어야죠.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창원특수강의 높은 자기자본, 시장환경, 회사내부 사정 등으로 인해 흑자전환은 무리라고 보고 있었다.
“포스코는 창원특수강 인수에 무려 3600억 원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직원들의 하나 된 노력, 포스코의 기술지원, 포스코 문화 도입, 각종 경영혁신에 힘 입어 흑자행진을 계속했습니다. 이익금이 상당히 쌓이고 나니, 주주들로부터 600억 원을 유상감자하라는 강력한 요구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주식 평가차액 약 100억 원을 포함하여 700억 원을 주주들에게 상환했습니다. 유상감자를 한 것이죠. 유상증자는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유상감자를 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들어보기 힘듭니다. 사람의 힘이 한 군데로 보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봐요.”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정비의 기본은 역시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것’이라고 했다.
“기본과 원칙의 실천은 시대 변천에 관계없는 대명제입니다. 물론 기본과 원칙이라는 것이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점을 공적인 눈으로 해석하면 한 군데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거기다가 교육을 통해 행동양식과 정체성을 공유한 기업문화가 정립되면 그야말로 ‘뿌리 깊은 나무’요, ‘샘이 깊은 물’이 되는 거지요. 포스코의 변함없는 전진을 기대합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1992년 5월, 당시 이동통신사업추진반 사업팀장을 맡고 있던 김권식 전 부사장이 미국 퀄컴(Qualcomm) 사를 방문해 CDMA 휴대폰으로 한국의 지인과 통화를 하는 모습. |
▶ 1973년 포항 인재창조원(現 홍보센터 자리)에서 교육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권식 전 소장(동그라미). 그의 왼쪽 옆으로 정용희 전 상무(①), 홍상복 전 부사장(②)의 모습도 보인다. |
▶ 제2제철 건설 후보지로 아산이 거론되던 1979년 무렵, 그는 설비계획부 소속으로 제2제철 설비계획 수립 과정에 참여했다고 과거를 회고했다. 김권식 전 소장(왼쪽 첫 번째)과 당시의 동료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