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연산(粗鋼年産) 850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 4기 설비가 종합 준공된 것은 1981년 2월 18일이었다. 4기 설비 중 가장 먼저 1980년 7월 1일 준공된 2열연공장은 공장 길이가 1000m에 이르는, 단일 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2열연공장이 제품 생산에 들어가 핫코일을 쏟아내자 이전까지 매우 호의적이었던 일본 기술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열연연수단장 맡아 뭐든 배우고자 했던 日제철소 연수 경험, 큰 교훈
– 냉연품질비상대책회의 주재하며 품질문제 해결··· 조업기술 향상에도 기여
– 제철소 최종 공정인 압연라인서 제품생산 종사하며 마케팅 감각도 생겨
조강연산(粗鋼年産) 850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 4기 설비가 종합 준공된 것은 1981년 2월 18일이었다. 4기 설비 중 가장 먼저 1980년 7월 1일 준공된 2열연공장은 공장 길이가 1000m에 이르는, 단일 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 2열연공장이 제품 생산에 들어가 핫코일을 쏟아내자 이전까지 매우 호의적이었던 일본 기술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이원섭 전 전무이사는 당시를 떠올렸다. 2열연공장 건설 당시만 해도 일본 신일본제철의 오이다(大分), 기미쓰(君津) 양 제철소는 기술 파트너로서 여러 가지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막상 포항제철의 거대한 최신예 설비에서 효율적인 생산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는 부메랑 효과를 우려한 나머지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신일본제철은 1열연공장 기술지원은 물론, 아무것도 모르던 포스코 연수생들을 받아 조업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했습니다. 2열연공장 건설 당시에도 몇 사람이 신일본제철에서 연수를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포항제철을 두고 부메랑 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처음 나온 것은 550만 톤 체제의 3기 설비 준공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일부 그런 우려가 있었을 뿐 우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4기 설비 준공 이후에는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 외에는 일절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태도가 아주 달라진 것이었지요.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워 기술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에 최초로 투입되었던 공채 2기생들
이 전 전무이사는 1970년 3월 1일 공채 2기로 포항제철에 입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많은 응시자가 몰렸다. 전공, 영어, 논문, 상식으로 구성된 1차 필기시험을 치른 합격자들은 임원을 포함한 20여 명의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독방에서 박태준 사장과 마주했다.
“그때 박태준 사장을 처음 뵈었습니다. 특별한 질문 없이 ‘열심히 해’ 하는 일상적인 말씀으로 면접이 끝났어요. 1969년 말 경 합격통지를 받고 합격자 33명이 서울 명동 YWCA 회관에 소재한 본사에서 2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약간의 용돈도 받아 가면서 교육을 받았으니 좋은 시절이었지요. 이듬해 3월 1일부로 입사 명령이 나고 열차로 포항에 내려갔더니 회사 버스가 동촌동 독신료로 데려가더군요. 독신료 2개 동에 식당이 하나 있었고, 독신료 몇 개 방을 사무실로 사용했어요. 사무실에는 박종태 소장, 서복수, 고 김신정 이렇게 세 분밖에 없었습니다. 1기생이 먼저 입사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주로 서울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2기생들이 최초로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는 KISA와의 기본협정이 해지된 후였기 때문에 제철소 건설 계획이 삐거덕 거리면서 종합제철 건설이 된다, 안 된다 하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회사가 공중에 붕 떠버린 거였어요. 그런 분위기다 보니 제대로 된 일이 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박종태 소장 지휘 하에 자료 공부나 하고 설명회를 갖기도 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결국 일본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103만 톤 체제의 제철소 건설 계획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1970년 4월 1일 1기 설비가 종합 착공되면서 제철소 조직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압연설비부에 소속되어 사무실은 롬멜하우스로 옮겼습니다.”
당시는 건설, 조업, 정비 분야가 따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명식 토건부장 휘하의 건설 쪽에 파견되어 보조감독을 맡고 있다가 10월 1일 열연공장, 10월 30일 후판공장이 착공되면서 압연설비부로 복귀했으나 역시 건설 쪽의 보조 역할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제철소 건설 현장 곳곳에서는 파일 항타의 굉음이 울려 퍼졌고 신입사원의 수도 부쩍 늘어갔다. 비로소 제철소가 들어선다는 분위기가 완연했고 현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1972년에 들어서자마자 열연 부문 조업기술 연수팀 27명은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신일본제철의 무로란(室蘭)제철소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제철소의 3교대 작업에 맞춰 우리 연수생들도 3교대로 편성되어 가열로에서부터 최종 정정 라인까지 전 공정에 배치되었어요. 무로란제철소 조업요원들과 같은 근무 복장을 하고 6개월간 스케줄에 따라 연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1시간 전에 먼저 출근해서 현장 청소를 말끔히 해놓고 일본인 기술자들이 출근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떻게든 그들 눈에 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어요. 당시 운전은 수동 작업이었는데 운전자의 뒤에 서서 눈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연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수생들과 일본인 기술자들 사이에는 일대일로 고정적인 파트너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러한 관계는 연수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관계를 맺은 일본인 기술자는 ‘세와야쿠(世話役)’라고 해서, 우리나라로 치면 군대 생활의 ‘사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용어를 확인하고 외우고, 자료를 수집하고 익히고 하면서 차츰 시간이 흘러가자 ‘세와야쿠’들은 쉬운 작업을 할 때는 조금씩 운전대를 맡겼다. 6개월이 다 되어 갈 때는 운전대를 맡기는 시간이 부쩍 늘었고, 연수생들은 보이는 자료마다 복사를 해두어 숙소에는 청사진으로 구운 자료가 꽤 많이 쌓였다.
무로란제철소의 포스코 열연연수생 27명
박태준 사장 앞에서 열연공장을 직접 가동하다
“연수가 끝나는 시기인 7월 6일 박태준 사장이 연수 현장에 오신다는 이야기가 있었기에 당시 연수단장을 맡았던 나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준비에 매달렸습니다. 무로란제철소 측에서는 박태준 사장이 보는 앞에서 우리 연수생들이 전 라인을 운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당시 현장에는 신일본제철소 본사의 임원들과 아리가 JG(Japan Group) 단장까지 와 있었는데, 우리 연수생들은 완벽한 운전을 수행해 냈습니다.”
7월 10일 연수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귀국했을 때, 포항 현장에는 상당한 설비가 들어서 있었고 제일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은 설비 시운전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무로란제철소의 세와야쿠들도 포항까지 와서 압연 라인의 시운전 및 조업지도를 해주었다.
“후판공장은 7월 4일 이미 준공되어 조업을 시작했고, 석 달 뒤인 10월 3일 열연공장이 준공됨으로써 본격적인 생산체제가 가동되었습니다. 고로와 제강공장이 준공되기 전이었으므로 수입 슬래브로 조업을 했는데, 말 그대로 ‘산업의 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나는 작업장으로서 3교대 근무를 했는데, 정해진 근무시간은 8시간이었지만, 실제로는 잠 자는 시간 빼고 거의 현장에 머무르다시피 했습니다. 2근 할 때, 그러니까 오후 3시에 출근해서 11시에 퇴근 할 때에야 동료들과 형산강 다리에서 잠시 소주 한잔 나눌 틈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1978년 착공된 조강 850만 톤 체제의 4기 설비에는 2열연공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그는 열연부 차장으로서 2열연공장 조업반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2열연공장은 1열연보다 파워와 폭을 대폭 증강하고 프로세스 컴퓨터를 채용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기술적 파트너는 역시 신일본제철의 오이다, 기미쓰 제철소였다. 3년 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81년 2월 28일 4기 설비가 종합 준공되자 일본의 태도가 일변했다.
“모두(冒頭)에 거론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부메랑 효과에 대한 우려가 드러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매우 사무적이고 공식적인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당시 그가 맡고 있던 열연과 후판 분야는 오로지 일본과만 기술적 교류를 하고있었다. 설비는 미쓰비시중공업, 조업기술은 신일본제철로부터 도입했기에 다른 설비와 기술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시기에 열연제품의 두께를 제어하는 AGC(Automatic Gauge Controller)를 개발한 영국의 데이비 셰필드(Davy Sheffield)사와 이를 적용한 핀란드의 라따우끼(Rautaruukki) 제철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채용하고 있던 것은 전동(電動) 시스템이었는데, 그들은 유압(油壓)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열연공장의 핵심설비의 운전도 우리는 5~7명이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2~3명이었고, 백패널(back panel)의 볼륨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후 미쓰비시에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고, 설비 합리화를 통해 데크(deck)를 줄여나가면서 단계적으로 전 라인의 인력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사적 ‘냉연비상’ 극복을 위해 손 걷고 나서다
압연 담당 부소장으로 승진한 후 1988년 10월에는 전사적 ‘냉연비상’이라는 복병과 마주해야 했다. 1988년도에 서울올림픽이 있었으므로 경기장, 호텔 등 인프라 구축의 마감재로 냉연강판, 도금강판 등이 대량으로 소요되는 바람에 품질에 관계 없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지만, 올림픽이 끝나자 출하가 전혀 안 되면서 전사적인 냉연비상이 걸렸다. 당시 그는 열연, 후판, 냉연, 전기강판, 선재, 스테인리스 등 6개 부서를 담당하면서 제강, 연주, 열연, 냉연, 연구소, 기술스태프 부서 등이 참여하는 냉연품질비상대책회의를 주재했다.
“매일 저녁 8시에 열리는 대책회의를 주재했는데, 시장이 포스코 제품을 외면했던 이유는 크게 품질과 A/S 두 가지로 생각됐습니다. 냉연 품질에 관계되는 모든 부서가 혼연일체가 되어 정보를 공유하고 품질 향상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1년 사이에 거의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향상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제강, 연주를 비롯해 냉연까지의 조업기술이 더불어 향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냉연비상 문제가 마무리 되어가던 즈음인 1990년 4월 9일에는 광양제철소 압연담당 부소장으로 보임되었다. 광양 1기 설비가 준공되어 조업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압연 라인에는 1열연, 1냉연, 1도금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열연은 비교적 잘 돌아가고 있었으나, 문제는 냉연과 도금, 특히 도금공장이었다. 거의 매일 라인스톱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도금공장에서 라인스톱이 일어나면 그때 전체 라인에 걸려 있는 모든 소재는 스크랩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났으니 그 손실이 얼마였겠어. 내가 해결사로 왔구나 생각하면서 포항에서의 경험을 살려 똑같은 체제를 가동했어요. 제강에서부터 연주, 열연, 연구소, 정비부서, 관련 부서를 총동원해 꼼꼼하게 관리한 결과 매일 가동률, 생산성, 품질 등이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습니다.”
광양 1열연공장에 5피트 폭 압연기 도입 강력 주장
그는 광양제철소 계획 과정에서 열연공장 압연기 폭을 두고 고준식 전 사장과 밀고 당기기를 한 기억을 떠올렸다. 압연기 폭을 4피트로 할 것이냐 5피트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는 포항 열연공장 가동 경험을 바탕으로 광양은 5피트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6년 열린 특별임원회의는 광양제철소 열연공장 압연기 폭 하나만 논의하는 자리였다. 회의에는 신일본제철의 기술진도 참석했다. 회의를 주재한 고준식 사장은 4피트 의견을 제시했다. 예산 문제로 4피트로 결정되어가는 분위기였다.
“나는 열연1부 차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해 5피트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당시 백덕현 포항제철소장, 박득표 부사장께서도 지원해 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대세는 4피트로 기울었고 결국 그렇게 결정되고 말았어요. 허탈했습니다. 그런데 약 한 달 후에 박태준 회장으로부터 광양 1열연공장 압연기 폭을 5피트로 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거야. 우리는 만세를 불렀고, 결국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약 광양 1열연공장이 4피트로 건설되었다면 지금 광양제철소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틀림 없이 물량 밸런스와 시장에 대응하는 문제로 애를 먹었을 겁니다. 광폭 압연기에서는 협폭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생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압연기는 한번 설치하면 교체할 수도 없습니다. 꼭 필요하면 공장을 하나 더 짓는 수밖에 없어요.”
김만제 회장 재임 시에는 미니밀 도입을 결정하고 1995년 1월 24일 광양제철소에 착공했다. 정확한 도입 배경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시 현장에서는 한보가 미니밀을 도입해 저가의 제품을 생산할 것이므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때도 나는 4스탠드로 계획된 것을 5스탠드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내 관장 업무는 아니었지만, 제철소의 최종 공정인 압연라인에서 최종제품 생산에 종사한 사람은 비록 엔지니어지만 마케팅 감각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미쓰비시를 설득해서 별도의 예산 증액 없이 어느 정도 박물(薄物) 생산이 가능하도록 5스탠드를 관철시켰어요.”
포스코-신일본제철 임원기술교류회의 기틀을 최초로 마련하다
1998년 그는 본사 기술본부장으로서 양소의 기술적 문제, 포스텍, RIST, 환경기술, 대학의 R&D까지 관장하면서 그해 말 신일본제철과의 임원기술교류회를 처음으로 열었다. 당시 그는 기술본부장 직책을 맡은 전무로서 신일본제철의 기술담당 부사장을 맞았는데, 그 이가 바로 무로란제철소 연수 시절 만났던 테라카도(寺門) 압연계장이었다.
“서로 좋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면서 과제 발표 등을 통해 유익한 기술정보도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 9월 포철기연 사장으로 가면서 30여 년의 포스코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후배들은 우리 때와는 다른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겁니다. 우리는 두 눈 감고 열심히만 하면 되는 시절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국제경제의 흐름, 산업의 재편 등을 직시하고 이에 대응해야 하니 한 차원 높은 어려움을 극복해야겠지요. 그러나 포스코의 항구여일(恒久如一)전통이 있으니 지금도 잘 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박태준 사장은 1972년 일본 무로란제철소를 방문해 연수생들이 직접 열연공장을 가동하는 것을 지켜보고 격려했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 이원섭 연수단장(동그라미)을 비롯한 연수단이 박태준 사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1973년 7월 3일 포항 1기 설비 종합준공을 맞아 제철소 시찰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이 열연공장에 들러 공장이 가동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박 대통령 우측에 이원섭 당시 열연작업장(동그라미)의 모습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