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로 접어들면서 포항 제3고로가 노황부조(爐況不調)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사태는 점점 우려한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노내(爐內) 온도가 1400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출선구가 막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른바 3고로 냉입사고(冷入事故)였다. 김일학 전 기성(技聖)은 당시 3고로 안전주임으로서 묵중하게 버티고 선 고로와 밤낮으로 씨름을 했으나 노황이 정상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1979년 포항 3고로 냉입사고 당시 한 달간 고로 옆에서 잠 설쳐
– 사고 극복 과정에서 탄탄한 신지식 쌓고 포스코만의 노하우 습득
– 출선구 뚫는 ‘일발개공’ 기술 개발··· 세계적으로 상용화되기도
1979년 8월로 접어들면서 포항 제3고로가 노황부조(爐況不調)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사태는 점점 우려한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노내(爐內) 온도가 1400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출선구가 막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른바 3고로 냉입사고(冷入事故)였다. 김일학 전 기성(技聖)은 당시 3고로 안전주임으로서 묵중하게 버티고 선 고로와 밤낮으로 씨름을 했으나 노황이 정상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로 철피 안쪽에 설치된 냉각반의 물이 노내로 흘러들어가 고로 내부 온도가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코크스와 철광석을 장입하고 풍구를 통해 1200도의 열풍을 불어넣으면 코크스가 타고 철광석이 녹으면서 노내 온도는 최고 2200도까지 치솟는데, 이게 1400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선(出銑)을 하면 철 성분은 흘러나오지만, 슬래그는 노내에 굳어져 바닥에서부터 쌓이게 된다. 결국 출선구가 막히고 말았다. 고로 내부에 쌓인 슬래그 레벨이 풍구에까지 이르자 풍구를 열고 이걸 꺼내기로 하고, 34개의 풍구 아래 바닥에 빙 둘러 모래를 깔고 각 풍구마다 사람을 배치했다.
“풍구 아래에 샌드베드(sand bed)를 만들고 몇 개 열어보는데, 노내에 쌓인 슬래그가 쏟아져 나와 모래 바닥에 떨어졌어요. 급히 1.5m 아래의 주상으로 뛰어 내렸지만 그만 발을 데이고 말았습니다. 안전화 위에 떨어졌지만 워낙 고온의 물질이다 보니 안전화를 태우고 발에 화상을 입힌 것이었어요. 현장으로 달려온 의료실 요원들이 주사를 놓아주고 약도 주기에 그대로 버텼는데, 발이 부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시내 외과의원으로 갔더니 늦었다고 하면서 큰 병원으로 가라는 거였어요.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데, 현장 상황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병원에 누워 있다는 게 마치 죄인이 된 심정이었어요.”
고로 박사로 알려진 김철우 기술연구소장이 매일 현장을 찾았고, 제철소장 이하 제철소 고위 간부들이 아예 사고 현장으로 출근하는 강행군 속에 3고로는 결국 한 달여 만에 정상화되었지만, 이후에도 약 6개월간 부분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니까 완전한 정상화가 이루어지까지는 7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었다. 그 기간 중에는 1, 2고로의 출선량을 최대로 늘리고 심지어는 주물선고로까지 제강용 용선을 생산하는 것으로 제강 소재를 맞추었다. 제강에서도 스크랩 사용량을 최대로 늘려야 했다.
그는 이후 포항 4기의 고로에 주물선고로까지, 그리고 광양 5기의 고로를 모두 섭렵한 고로 조업의 달인으로 불렸고 이후 이 분야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기성(技聖)에까지 올랐지만, 정작 그가 포항제철소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제강부의 석회소성공장이었다.
1972년 경력직 입사··· 쌍용시멘트 근무 경험으로 석회소성공장에 배치
“쌍용시멘트 원료계에서 일하다가 1972년 8월 30일 포스코로 옮겨왔어요. 1기 설비 건설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39명이 함께 입사했는데, 쌍용시멘트 근무 경력 때문에 석회소성공장으로 명령이 났습니다. 당시 나는 제강조업 현장근무를 원했어요. 시멘트공장을 그만두고 제철소로 왔는데, 또 석회석 취급하는 일을 하려니 신이 나지 않았어요. 제철소에 왔으면 모름지기 펄펄 끓는 쇳물을 다루는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제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쪽에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알아보니 제강조업의 마지막 라인인 조괴공장의 작업이 매우 힘들어 다들 기피한다고 하기에 제강부 차장에게 그리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거기는 너무 힘든 곳이니 좀 기다려 보라는 거였어요.”
1973년 6월 8일 내용적 1660m³의 제1고로가 화입되고 나서 본격적인 쇳물 생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초기 조업은 매우 어려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는 호락호락하게 쇳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용광로를 빠져나온 쇳물은 대탕도를 흘러가면서 비중 차에 따라 슬래그는 상부로 떠오르고 용선은 하부로 흐르다가 분리된다. 그런데 어렵게 출선이 이루어진 후에도 쇳물의 온도가 조금 낮아지고 규소(Si) 성분이 높아 유동성이 나빠지면 상부에 떠오른 슬래그는 흘러가지만, 하부로 흐르는 쇳물은 바닥에 자꾸 눌어붙었기 때문에 4각으로 제작된 각목으로 부착 부위를 계속 문질러 주어야 했다. 이는 너무나 고된 일이었다. 일본 JG(Japan Group) 기술지도 요원의 권유에 따라 6~7일 주야 근무체제로 이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모두가 손에 물집이 잡히면서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 작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본 기술요원들은 노전(爐前) 작업이 고열의 힘든 작업임을 감안해 4조 3교대로 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포항제철소의 근무 체계는 3조 3교대였습니다. 그런데 고로 노전조업반만은 4조 3교대를 실시하기로 하고 필요한 인력을 사내에서 모집했는데, 거기 응시했어요. 작고하신 조용선 당시 1고로공장장과 최의주 인사과장이 면접을 보았는데, 거기에 뽑혀 1973년 6월 16일 고로 노전반으로 갔습니다. 고로에 불을 당긴 지 9일차가 되는 날이었어요. 반장이 반원으로 갔으니 직급 상으로는 큰 손해를 본 거였어요. 그러나 나이나 경력 같은 것은 따지지 말자고 결심하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쇳물의 현장에서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일관제철소의 핵심설비인 고로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저로 하여금 큰 자부심을 느끼게 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고로 노전반 근무 자청, ’33년 쇳물 인생’의 시작
이때부터 그의 쇳물 인생 33년이 시작되었다. 고로설비는 석회소성설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원한 일이었기에 여기서 포기하면 낙오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 당시에는 교대작업을 하는 작업장은 대졸 사원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 가마이시(釜石) 제철소 장기 연수 과정에서 손에 넣은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노트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김 전 기성은 이걸 빌려 시내에 나가 청사진을 구워 그게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고열에 노출된 출선작업 현장은 모든 작업 요원들에게 견디기 힘든 인내를 강요했지만, 그는 스스로의 꿈을 이뤄내는 터전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가 처음 쇳물을 토해내는 광경은 바라보는 자체가 감동이었고 행복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 이미 그의 쇳물 인생 33년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새로운 고로가 준공될 때마다 그 쪽으로 옮기면서 포항제철의 모든 고로를 거치게 되었다. 1974년 6월에는 주물선고로가 준공되어 반장 밑의 차석으로 갔다. 주물선고로는 내용적 330m³의 소형 고로로서 중소기업 수준에 머물러 있던 국내 주물업계에 소재를 공급하기 위해 국가 전략적 사업으로 추진되었는데,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포스코가 실수요자가 되었다.
“주물선고로에서 쇳물을 굳혀 냉선(冷銑)을 만들면 그게 최종 제품입니다. 포스코 제품 중에 제강과 압연 공정을 거치지 않는 유일한 제품이죠. 1976년에는 2고로가 준공되어 그리로 갔는데 이때 비로소 반장 직함을 얻었어요. 1973년 석회소성공장에서 사내 모집을 통해 1고로로 옮기면서 잃은 반장 직함을 되찾는 데 3년이 걸린 겁니다. 1977년 말에 3기 설비가 준공되면서 3고로 주임이 되었고, 1980년 8월 4고로를 거쳐 1985년 4월 광양 제선부로 옮긴 뒤 2005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잠시도 고로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코크스나 소결광의 분이 너무 많이 들어가거나 광석 자체의 성분불량 등으로 인해 노황부조가 발생하곤 하지만 포항 3고로는 건설에서부터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그는 진단했다. 3고로 건설 당시는 이른바 중동 붐으로 국내 고급 기술 인력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비계공(飛階工), 용접공 등의 핵심 인력이 모자라 공기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는 것이다.
“고로 시공사가 현대건설이었는데, 기술 인력을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계열사인 현대중공업의 기술 인력을 대거 동원해 현장에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고로 조업은 노내에 있는 고온의 용융물(熔融物)과 고로 철피 내부에 설치된 냉각반의 온도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합니다. 물과 열의 싸움인 거죠. 물이 들어가는 파이프에서 물이 나가는 파이프 사이에 수많은 냉각반이 설치되는데, 통수작업을 해서 하나하나 점검해 보니 물이 새는 데가 한두 곳이 아니었습니다. 용접 작업의 부실 때문이었어요. 참 어렵게 준공했는데, 결국 냉입사고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일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본인 기술자들도 중요한 핵심 기술은 공개하지 않았다. 또 그런 기술들은 기술자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손끝의 기술이기 때문에 표준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포스코는 1고로 조업을 하면서 터득한 기술을 2고로로, 다시 2고로에서 3고로로, 3고로에서 4고로로 피드백하는 식으로 전체적인 제선기술을 발전, 축적시켜 나갔다.
포항제철소 4기 설비가 준공된 이후 일본의 태도는 완연히 달라졌다. 결국 광양제철소 건설 시에는 설비 공급에 있어 고자세와 높은 가격으로 대응하기에 이르렀다. 광양제철소 주요 설비 중 압연설비만 일본 미쓰비시가 공급하고 나머지 고로, 제강, 연주 설비는 유럽에서 들여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84년 광양 1기 설비 건설에 들어갈 때 박태준 회장의 지시에 따라 고로조업 요원 4명이 제선설비 공급사인 영국 데이비(Davy)에서 18개월 동안 연수를 받았습니다. 과장급, 기술원, 주임, 반장, 직원 각 1명이었어요. 당초 2년 계획이었는데, 18개월로 연수를 마쳤습니다. 같이 어울려 다니면 영어 습득에 장애가 될까 봐 하숙집도 따로 잡았는데, 이때 많은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설비 시스템이 일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시스템에는 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을 임시로 저장하는 혼선로가 있지만, 데이비에는 그게 없습니다. 지금 보면 포항과 광양의 직원들 분위기가 조금 다른데, 광양이 약간 개방적이지요. 유럽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오픈 마인드가 전수되지 않았나 싶어요. 포스코의 고로조업 기술 체계는 포항의 일본 시스템과 광양의 유럽 시스템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두 체계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져 새로운 포스코형 시스템이 만들어진 거죠.”
포항·광양 총 10기 고로의 건설-화입-조업 모두 참여한 고로 분야 1인자
그는 포스코 인생 33년 동안 고로설비 개선에 끊임 없이 정열을 쏟았다. 포항과 광양 각 5기의 고로, 모두 10기의 고로 건설과 화입, 조업에 참여해 정상조업도 달성 세계 신기록을 연속적으로 갱신하는 한편, 광양제철소 제선 부문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는 데 초석을 놓았다.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부단한 자기계발을 추구하면서 초창기 저근속 사원이 대다수였던 광양제철소 고로 인력의 기능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창의와 의욕이 넘치는 조업현장으로 바꾸어 갔다.
“고온의 가스가 열교환을 거치지 않고 용광로 바깥으로 배출되는 취발 사고, 풍구가 고온의 용융물과 접촉해 녹아버리는 풍구대파 사고, 고로 내부의 온도가 떨어져 쇳물이 용광로 밖으로 배출되지 않는 냉입사고 등을 겪었지만, 그런 사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탄탄한 기반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출선구 개공용 치공구(治工具)인 심리스파이프(seamless pipe) 내부로 연소성이 없는 고압질소와 미스트를 쏘아 넣으면서 단번에 출선구를 뚫는 일발개공 기술을 개발해 출선 작업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것도 따지고 보면 여러 가지 기반 지식의 조합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일발개공 기술은 광양은 물론 포항제철소 전 고로에도 적용되었고,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된 기술로 상용화(常用化)되었습니다.
포스코 퇴직 후 계열사에 근무할 때에도
고로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현장으로 달려가
고로 건설이나 개수 시에 소요되는 내화물은 조선내화가 생산을, 포스코켐텍이 시공을 담당함으로써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비효율적인 점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내화의 하도급업체인 (주)선우ENG가 고로탕도 책임시공을 하는 체제로 전환했는데, 2005년 퇴사 후 그는 선우에 근무하다가 2008년 4월 SNNC로 자리를 옮겼다. 포스코 계열사인 SNNC는 스테인리스강의 주원료인 페로니켈 등을 생산, 판매하는 국내 최초의 페로니켈 제조 전문기업이다.
“거기 가 있으면서도 포스코 고로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FINEX 현장에까지 불려간 적이 있어요. 근무처가 제철소 인근인데다 사는 데가 주택단지이니 언제든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지요. 다른 회사 공장에 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여기가 나의 주된 일터인데 무슨 일이 있어서 잠시 현장을 비운 사이 문제가 있다고 하니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포항 1고로 조업과 지금의 고로 조업을 비교하면 몇 백 년이 흘러간 것처럼 생각됩니다. 요즘에는 5분이면 끝나는 출선구 개공작업도 1시간 이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2시간이 소요되기도 했습니다. 요즘이야 고로 내부를 살피는 각종 전산장비가 갖추어져 있고 모든 작업이 자동화 설비로 이루어지지만, 그때는 고로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모든 걸 감(感)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개공 시에는 산소 운반용기를 어깨에 메고 작업에 임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함께 근무한 후배 직원들에 얽힌 이야기를 좀 안타까운 옛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몇몇 직원들은 매우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였는데도 실력이나 기술이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모두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니 왜 그랬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정에 약한 것 같은 모습을 많이 보였다고 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가 이혼의 아픔을 겪는 일도 보았고, 형제간에 돈 문제로 다툼이 생겨 빚 잔치를 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친구의 월급을 모두 빼앗아 용돈만 조금 주고 반장이 관리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월급쟁이는 월급쟁이로 사는 법을 익히고 지켜야 합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면 자녀 교육까지는 무난히 마쳐줄 수 있고 어느 정도 안정된 노후를 보낼 수 있습니다. 대신 엉뚱한 일을 벌여서는 안 되는 것이 월급쟁이의 삶이지요. 마지막으로 현장을 열심히 훑으면서 설비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간부들도 현장 직원들에게 묻는 것이 기술인들의 세계입니다.”
우재욱<시인·작가>
▶ 김일학 전 기성은 쌍용시멘트에서 약 8년간 근무한 후 1972년 8월 30일 부로 포스코에 입사했다. 당시 연수원이 위치해 있었던 현재 홍보센터 자리에서 김일학 기성(동그라미)이 경력사원 동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1983년 포항 3고로 중앙운전실에서 동료들과 노황부조 해결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김일학 주임(가운데). |
▶ 1992년 9월 25일 열린 광양 4고로 화입식에 참석한 김일학 기성보(왼쪽에서 세 번째)가 동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광양 4고로의 첫 출선에 성공한 1992년 9월 26일 아침, 김일학 기성보가 내빈들 앞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고 있다. |
▶ 1995년 10월 1일 포스코 4대 기성으로 보임된 김일학 기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수동 기성, 김일학 기성, 김종진 사장, 연봉학 기성, 변성복 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