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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71] 윤여경 前 KIST 경제분석실장, 종합제철 건설계획 경제적 타당성 분석한 KIST 1세대 연구원

[남기고싶은이야기 71] 윤여경 前 KIST 경제분석실장, 종합제철 건설계획 경제적 타당성 분석한 KIST 1세대 연구원

2016/08/08

한국 경제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시기였던 1969년 6월이었다. 윤여경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경제분석실장은 최형섭 소장이 급히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장실에서는 최 소장과 김재관 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재관 박사는 서울대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해 뮌헨공과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1962년부터 다년간 독일 데마그(Demag)에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당시 국내 최고의 철강 전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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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초창기 KIST 유일의 경제전문가··· ‘종합제철 건설추진 전담반’ 참여

– 김재관 박사 등과 밤낮없이 매달려 ‘포항제철소 종합건설계획안’ 완성

윤여경 前 KIST 경제분석실장 주요 경력 1935 서울 출생  1960 미국 유타주립대 경제학과 졸업  1962 미국 퍼듀대학원 산업경제학 (Industrial Economics) 석사  1962 미국 노던 일리노이 가스컴퍼니 (Northern Illinois Gas Co.,) 입사  1968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경제분석실장, 공업경제부장  1974 한국기술진흥주식회사 대표이사  1978 KIST 기획관리위원회 부위원장(겸직)  1982 한국개발투자금융 부사장, 대표이사 사장  1999 KIST 기술사업단 고문  1999 P&I 회장, 고문  2001 중앙대학교 경영대학 겸임교수  2007 P&I 대표이사 회장  상훈  1973 국무총리 표창(2회 수상)

한국 경제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시기였던 1969년 6월이었다. 윤여경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 경제분석실장은 최형섭 소장이 급히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장실에서는 최 소장과 김재관 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재관 박사는 서울대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해 뮌헨공과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1962년부터 다년간 독일 데마그(Demag)에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당시 국내 최고의 철강 전문가였다.

“김재관 박사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던 시절부터 우리나라도 종합제철소를 가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었고, 독일 현지 기업에 근무하면서 꾸준히 종합제철소의 건설과 운영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이어온 인물이었습니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제철의 필요성과 추진계획을 작성한 보고서를 제시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어요. 그만큼 종합제철과 건설에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귀국해 KIST 철강연구실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최형섭 소장이 입을 열었다.

“윤 실장, 김 박사가 대단히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었는데, 윤 실장이 합류해서 그를 적극 도와야겠어요.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업이고 특히 KIST로서는 설립 이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될 것이오. 현재 우리나라 실정으로 보아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관은 KIST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오.”

대단히 중요한 프로젝트란 바로 국내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 사업이었다. 소장실에서 나온 두 사람은 김 박사 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상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재관 박사는 신념에 찬 표정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첫째, 북한에는 있는 종합제철공장이 우리에게는 없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오래 전부터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숙원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 둘째, 우리나라는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 사가 주축이 되어 영국, 서독, 이태리, 프랑스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KISA(대한국제제철차관단)와 연산 6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 및 이에 소요되는 외자 조달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추진해 왔다.

– 셋째, 그런데 최근 KISA에서 작성한 타당성 보고서가 세계은행과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체)로부터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 넷째, 이로 인해 박충훈 부총리가 해임되고, 김학렬 청와대 경제수석이 새 부총리로 임명되었다.

– 다섯째, 신임 김학렬 부총리는 외국의 용역기관에 의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힘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새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다시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KIST에 의뢰할 예정이다.

– 여섯째, 사업계획서 작성에 필요한 기술적인 자료는 다년간 수집해 놓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는 철강시장을 예측할 만한 근거가 거의 없다. 경제분석실에서 외국 금융기관이 납득할 수 있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주어야겠다.

다음날 김 박사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는 사업계획서 작성의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경제분석실에서 외국 금융기관이 납득할 만한 시장 예측 모델을 만들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이를 뒷받침하는 체계화된 경제, 산업 관련 통계자료가 충분하다는 전제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종합제철과 같은 프로젝트의 시장조사는 전국의 모든 산업을 커버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는 산업 통계자료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다. 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으로 새로이 자료를 수집, 분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KIST 경제분석실 단독으로 자료를 수집, 분석하는 것은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윤여경 실장은 사실 그 분야의 대단한 전문가였다. 역설적으로 전문가였기에 무리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60년 미국 유타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퍼듀대학에서 산업경제학을 전공한 뒤 1962년부터 미국 노던 일리노이 가스컴퍼니에서 경제분석직으로 일해 왔다. 주로 투자 타당성 검토, 시장 개척 및 판매전략 수립 업무를 담당하면서 입사 6년 만에 애널리스트에서 슈퍼바이저를 거쳐 매니저로 승진한 인물이었다. 그 회사에서 처음 있었던 초고속 승진이었기에 경제분석 분야의 ‘울트라 엑스퍼트’로 불리기도 했다. 1968년 KIST의 재외 과학기술자 유치계획의 제1차 유치 과학자 18명 중의 한 사람으로 귀국해 경제분석실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자료수집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정부 주도로 추진하면서 김 박사와 내가 적극 참여하는 방법이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 박사도 내 의견에 동의해서 이 방안을 소장에게 보고했고, 최형섭 소장은 우리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학렬 부총리를 설득한 결과 1969년 6월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정문도 기획차관보가 단장, 노인환 공공차관과장이 간사로 임명되었지요. KIST에서는 나와 김 박사가 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전담반 일원으로 종합제철 사업의 경제적 타당성 증명 작업에 착수하다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전담반 회의가 열렸다. 경제기획원, 상공부, KIST,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 경제과학심의회의 등에서 차출된 1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항제철에서는 노중렬, 김학기, 최주선, 조용선 4인이 참여했다. 그 회의에서 김재관 실장은 기술 분야 반장을, 윤여경 실장은 경제적 타당성 분야 반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는 철강의 ‘ㅊ’ 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고, KISA와 IECOK는 무엇이며, 왜 우리나라에 종합제철소가 필요하며, 세계은행은 어떤 곳인데 이 사업에 타당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며 우리나라 부총리까지 갈리게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경제분석실 팀은 매우 젊었습니다. 실장인 내가 34세였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30세 전후였어요. 그러나 KIST 경제분석팀은 의욕이 넘치는 겁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우선 철강공업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어요.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였던 윤동석 박사의 ‘알기 쉬운 철강공업’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전 팀원이 2일간 탐독했고 잘 모르는 부분은 김재관 박사를 초빙해서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KISA 보고서도 읽고 이를 평가한 세계은행의 보고서도 자세히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니 우리나라 철강업계의 현황과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정도에 불과했죠. 그런데 한 달 만에 전담반에 참석해 보니 그래도 내가 뭔가 좀 알고 이야기하는 축에 속했습니다.”

경제분석팀은 KISA 계획이 국제 금융기관으로부터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정리했다.

– 김재관 박사의 기술 타당성 분석에 의하면 KISA 계획은 초기 투자를 최소로 줄인다는 기본 방침 아래 앞으로의 확장을 고려하지 않은 전근대식 설비를 적용했고, 규모 면에서도 조강 기준 60만 톤은 경제 규모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즉, 생산성이 매우 낮은 계획서였다.

– 이와 같은 비효율적인 시설과 규모 하에서 경제적 타당성을 도출하기 위해 KISA 계획에서는 제철공장에 필수적인 제반 지원시설 즉, 항만·통신·용수 및 전기 시설을 정부 부담으로 계획했고, 이러한 전제 하에 이미 정부에서는 이들 공사를 포항에서 착수한 상태였다.

– KISA 계획은 제조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전기 및 용수 공급 가격을 파격적인 특별 요금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있었다.

– 이 사업의 타당성을 맞추기 위해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국내 수요를 겨냥하여 철근 등 최종 제품 생산 및 판매 계획을 KISA 안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주어서 세울 종합제철공장이 궁극적으로 기존 철강업계의 강력한 경쟁자가 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경제 체제 하에서는 있을 수 없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국제 금융기관들은 강력한 반대 의견을 낸 것이었다. KIST는 전담반 두 번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방향을 제안했다. 전담반은 KIST가 제안한 기본방향을 중심으로 토론과 검토를 거쳐 전담반의 업무 추진 기본 방침으로 확장시켰다.

– 철강재의 수요는 언제, 얼마나, 왜 필요한가를 가능한 한 철저히 규명한다.

– 기계 시설은 철강재 형태별 수요에 맞추어 경제성 있는 최소 규모로 선정하되 미래의 확장 계획을 신중히 고려한다.

–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최종 제품이 아닌 중간 제품으로 국내 기존 제철업계에서 수입하던 원자재를 국산화시킴으로써 이들 기업들에 대해 원자재를 원활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부각시킨다.(원자재 수입대체 효과)

 – 그 대신 정부에서는 제철공장의 효율적 운영을 위하여 제반 지원시설 투자를 서둘러야 하며, 이 계획은 그 지방의 지역사회 발전을 전제로 수립하고 추진되어야 한다.

전담반의 작업은 한국에 종합제철소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하다 보니 타당성 검토라기보다는 프로젝트 정당화 작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 시간의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김재관 박사로 하여금 그동안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는 최소 경제 단위의 종합제철소 규모를 도출하게 한 뒤 1차로 이러한 규모의 국내 수요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만약 수요가 미치지 못한다면 수출 계획이라도 세워 최소 경제단위를 유지한다는 각오로 작업을 시작했다. 즉, 국제 경쟁력이 있는 최소 단위의 종합제철소 건설의 타당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김재관 박사는 조강 기준 100만 톤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종합제철소의 최소 단위라고 했다. 이에 따라 경제분석실에서는 일단 조강 기준 100만 톤 수요에 다다르는 연도를 예측하기로 하고, 김재관 박사팀에서는 조강 기준 100만 톤의 설비계획 수립에 착수하기로 했다.

“KIST는 수요 예측을 거시적, 미시적 접근 방식을 동시에 동원해 합리성을 증명하기로 했습니다. 거시적 분석에서 얻어지는 자료에 의해 조강 기준의 규모가 산출되고, 이는 장기 수요예측의 기초 자료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미시적 분석에서 얻어지는 자료가 있어야 공장 시설의 종류와 규모 선택의 당위성이 나오기 때문이었어요. 미시적 접근 방법으로 우리는 최종 제품에서부터 역으로 추적 계산해 올라가는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 공장의 생산 규모가 최종 조강 베이스로 산출될 수가 있기 때문이었죠.”

우선 거시적 분석으로 우리나라의 인당 GNP, 인당 철강재 소비량, 인당 자동차 보유 대수 등 여러 가지 경제 및 산업 지표를 일본의 과거 자료와 비교 검토한 결과, 우리나라가 일본에 약 20~25년 뒤져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 초반의 일본 철강공업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우리나라의 수입 통계와 생산 통계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국내 철강재 수요 자료를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안심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다. 1970년 말 우리나라의 철강 수요가 100만 톤이 훨씬 넘는 것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종합제철소 건설 타당성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미시적 분석이 따라야 했다. 미시적 수요 예측 작업에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부딪힌 문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료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상공부 김철 철강계장이 수집해 놓은 일본 자료가 충분히 있었다. 그도 전담반의 멤버였기 때문에 원활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에서 온 전담반 멤버들의 도움으로 확보한 일본의 1950년대 I-O테이블(Input-Output Table)들도 매우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 산업계의 수입 원자재로서의 철강재 수요를 예측한 겁니다. 그러니까 수입대체 사업으로서 종합제철 사업의 타당성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찾고자 한 것이었죠. 기업 측면에서의 타당성은 수요 예측을 바탕으로 제품별 생산 규모가 결정되었고 여기에는 김재관 박사의 전문적인 안목과 식견이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설 규모 결정, 생산시설 선정에서부터 투자비 산출은 물론 제조원가의 추정까지 가능하게 했습니다.”

전담반에서는 정부에서 직접 투자할 지원시설의 타당성을 찾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여기서도 종합제철을 위한 지원시설이라기보다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정부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라는 측면에서 비용 대비 혜택의 분석에 역점을 두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철광석과 원료탄의 장기 공급계약을 통한 조기 확보의 필요성도 강조했는데, 이는 훗날 포항제철이 가동 첫해부터 흑자를 시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앞으로 제품의 판매 가격을 결정할 때 수입 가격보다 5~10% 정도 낮게 책정하기로 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이 계획서는 하나의 기업으로서 자립 가능한 제철소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즉, 적당한 이익을 낼 수 있고, 장차 확장에 소요되는 자금 조달 능력도 갖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설득해야 했다.

“김재관 박사가 많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설 투자비를 줄이기 위해 제조 원단위를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설비 선정을 해야 했으니까. 꼼꼼하기로 이름난 김 박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러가지 인풋을 수시로 변경시켰어요. 물론 아웃풋은 경제분석실에서 계산했지요. 최종적으로 결정된 추정 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해서 외자 1억 2370만 달러, 내자 633억 원이 소요되는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사업계획서가 완성되었던 겁니다. 지금도 포스코가 1973년 103만 톤으로 출범했다는 기록을 볼 때 보람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도쿄에서 열린 한일경제장관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철강재 수요예측 결과를 발표하기까지···

1969년 7월 정문도 차관보가 대통령에게 종합제철 관련 최종 보고를 하는 자리에 KIST도 기술 담당 및 타당성 검토 책임기관으로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김학렬 부총리는 외자 1억 2370만 달러는 대일청구권자금으로 조달할 것임을 보고하면서 그동안 협의한 결과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입안한 종합제철 건설 계획의 타당성이 입증되면 그해 도쿄에서 열리는 양국 경제장관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합의했다는 보고도 함께 했다. 이후 일본은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타당성은 후에 신일본제철로 합병된 후지, 야하다, 일본강관 등 고로3사의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에서 검토할 것이며, 태스크포스는 기술적 타당성 검토팀과 경제적 타당성 검토팀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통보해 왔다.

한국에서도 일본에 파견할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했다. 정문도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여 노인환 공공차관과장, 김철 철강계장, 김재관 박사와 함께 그도 선발되었다. 김재관 박사는 기술적 타당성 검토 설명을, 그는 경제적 타당성 검토 설명을 맡았다. 그런데 정문도 차관보, 노인환 과장, 김철 계장이 모두 기술적 타당성 검토 설명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경제적 타당성 검토 설명은 혼자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타당성 검토 섹션에 들어선 그는 많은 참가 인원에 기가 질렸다. 10명이 넘는 일본 최고의 전문가들이 우리 측에서 작성한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을 일본어로 번역해 꼼꼼하게 탐독한 듯 군데군데 빨간 메모가 되어 있는 자료를 펴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고 회의를 영어로 진행할 것을 정중히 요청했는데, 참석자들이 동의해 주었어요.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수요예측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대해 한국에 있어서의 철강재 수요예측을 해보았으나 이 분야에 너무 경험이 일천하고 한국에는 산업통계 자료가 없어서 예측 방법 선정에서부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제하고,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겨우 이 정도 수준의 수요예측밖에 못했다면서, 이번 기회에 여러 선배님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앞으로 수정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로 브리핑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통계자료가 빈약해 일본 자료를 많이 활용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거시경제적 분석으로 양국의 경제발전 상황을 비교했다. 인당 GNP, 인당 철강 소비량, 인당 전력소비량 등의 자료를 비교한 결과 한국 경제는 일본에 20~25년 뒤져 있다는 결론에 따라 일본의 1950년대 경제 관련 자료를 많이 참고했다는 점과 특히 당시 일본 생산성본부에서 발행한 ‘I-O테이블’을 사용해서 철강재별 수요를 예측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역산해 올라간 결과가 조강연산 103만 톤이란 결과와 공장별 규모를 도출했다고 설명했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느낀 점은 대부분의 일본 전문가들이 일본어 번역본 사업계획서는 덮어놓고 내가 사용한 수요예측 방법, 그러니까 I-O테이블을 활용한 방법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질문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두가 I-O테이블을 사용해서 수요예측을 한 방법과 가정(假定)에 관련된 질문이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KIST의 수요예측 방법이 자기들로서는 처음 접하는 새롭고 합리적인 방법이었기에 매우 인상 깊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경제적 타당성 검토는 ‘철강재 수요예측 방법’에 대한 나의 설명 아닌 강의로 1시간 30분 만에 끝나버렸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성과였다. 수요예측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경제적 타당성은 당연히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오히려 예상을 뒤엎고 기술적 타당성 검토 섹션은 3시간 정도의 격론을 거친 후에야 결론이 났다. 김재관 박사가 많은 일본 전문가들을 혼자 상대하면서 어렵게 결론을 도출했던 것이다. 결국 선진국의 일류 컨설팅 회사가 작성했지만 세계은행, IECOK 등으로부터 거부당한 사업계획 타당성을 KIST가 거뜬히 성공시킨 것이었다. 이후 일본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타당성 검토 결과는 한일 경제각료회의에 보고되었고, 이는 대일청구권자금의 사용 합의로 이어졌다. 김학렬 부총리는 공식석상에서 “이번 KIST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이 계획서가 정식으로 타당성을 인정받음으로써 정부는 지금까지 KIST에 투자한 자금을 모두 회수한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몸바친 김재관 박사 없었더라면 

포스코 기술도입은 한참 뒤처졌을 것

당시 한국에 종합제철 관련 전문가는 김재관 박사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칭 조강연산 103만 톤이란 숫자도 김재관 박사의 자료에 근거를 두고 경제분석실에서 도출한 것이고 용광로, 압연공장, 후판공장 등 주요 시설의 배치도 그가 직접 포항에 내려가 도면을 보면서 허허벌판의 부지 위에 박은 말뚝들이 표준이 되었다. 원료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설비 제작 이전에 호주와의 원료탄 및 철광석의 장기 공급계약 체결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김재관 박사였다.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구매하는 설비는 ‘한일공동구매추천위원회’에서 결정해 추천하고, 이 위원회에는 한국 측 추진위원 4명(정문도, 김철, 김재관, 윤여경)과 일본에서 파견한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는 일본 전문가가 추천하는 일본 설비의 우선 선정이라는 암묵적인 양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측에서는 제철 설비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입 한 번 뻥긋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측의 주장을 무조건 수용해야 할 분위기였다. 이때 김재관 박사의 진가가 드러났다.

“설비 선정 과정에서 김 박사는 일본 측이 제시한 리스트를 검토하고 나서 왜 연속주조를 고려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일본 측 전문가들은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연속주조는 아직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실험 설비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경험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양산 설비로 채택하기에는 매우 위험하고 경제성도 없어서···’ 하면서 얼버무리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김 박사가 ‘연주설비가 아직 실용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에서 아직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겠지요’ 하면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연주설비를 도입한 국가와 제철소 5~6곳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나서자 그들이 입을 닫아 버렸어요. 결국 김 박사의 주장대로 연주설비를 채택했습니다. 나중에 실제 구매 과정에서 어떤 연유로 해서 연속주조가 빠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땐 분명히 연속주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설비 사양의 결정에 있어서도 김재관 박사의 숨은 공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그는 강조했다. 핫코일을 생산할 압연설비의 폭을 결정할 때 일본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의 산업발전 단계에 비추어 볼 때 협폭(狹幅)으로 하는 것이 경제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재관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앞으로 냉연설비를 갖춘다는 전제 하에 핫코일의 폭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측의 주장대로 하면 세탁기나 소형 냉장고 소재밖에 생산할 수 없는데, 한국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자동차 생산을 못한다는 법이 없으니 최소한 소형 자동차용 강판까지는 생산할 수 있는 정도의 설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해 그대로 관철되었다.

“후판의 두께를 두고 김 박사와 일본인 전문가들 사이에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김 박사는 ‘지금 내가 주장하는 두께의 후판은 선박용 후판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설비 가격이 비싸진다는 일본 전문가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어요. 그땐 일본 측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협상에서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김 박사가 나를 찾아와서 한일공동구매추진위원회를 사임하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두께의 후판공장이 아니면 더 이상 위원회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김 박사와 나는 사임서를 냈습니다. 이는 KIST의 위원회 탈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국내외 분위기로 보아 KIST의 위원회 탈퇴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박태준 사장이 중재에 나서 일본 측의 양보를 얻어냄으로써 이 문제도 일단락되었습니다.”

기술 측면에서 볼 때 포스코 프로젝트는 기술이전 프로젝트였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중에서도 엔지니어링 중심의 턴키 베이스 플랜트 기술도입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국제거래에서 공급자는 가급적 값싼 구식 설비를 비싸게 팔려 하고, 구매자는 가급적 값비싼 최신 설비를 싼값에 사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턴키 베이스의 플랜트 구매에 소요되는 외자가 없었고, 종합제철 관련 전문가가 김재관 박사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외자 조달을 위해 종합제철 건설 타당성 검토부터 시작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도 포스코는 효율적인 기술도입을 성공시켰다.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7~8년간 꾸준히 자료 수집과 분석을 해온 김재관 박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종합제철 계획은 최소한 10년 앞을 내다보고 수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가슴에 종합제철 건설이라는 웅지를 심어준 것도 그였고,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 조선산업 등 철강다소비 산업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만약 김 박사가 없었더라면 포스코의 기술도입은 최소한 5년 이상 지연되었을 것이고 외자도 최소 30% 이상 추가로 소요되었을 겁니다. 설비도 최신설비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포항제철의 인큐베이팅 과정에서 있었던 KIST의 여러 활동들이 역사 기록에서 묻혀 있는 것 같아 그 내용을 소상히 밝혔지만, 이후 포스코가 가동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써내려온 성공 신화는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포스코 임직원 여러분의 노력의 산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우재욱<시인·작가>

윤여경 KIST 경제분석실장은 1969년 6월 3일 경제기획원 내에 신설된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해, 종합제철 프로젝트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업무를 맡았다. 윤여경 KIST 실장과 김학렬 부총리(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김재관 박사(뒷줄 제일 왼쪽) 등 전담반 구성원들의 모습.

▶ 윤여경 KIST 경제분석실장은 1969년 6월 3일 경제기획원 내에 신설된 ‘종합제철 건설전담반(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해, 종합제철 프로젝트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 업무를 맡았다. 윤여경 KIST 실장과 김학렬 부총리(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김재관 박사(뒷줄 제일 왼쪽) 등 전담반 구성원들의 모습.

 

KIST는 1966년 설립과 동시에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한국인 과학자 18명(사진)을 유치했다. KIST 1세대 연구원 중 유일한 경제 분야 출신이었던 윤여경 경제분석실장(왼쪽 동그라미)은 종합제철 건설추진 전담반에서 김재관 박사(오른쪽 동그라미)와 함께 각각 경제적, 기술적 타당성 분석 업무를 담당하며 밤낮 없이 매달린 끝에 '포항제철소 종합건설 계획안'을 완성했다고 회고했다. (사진=KIST 제공)

▶ KIST는 1966년 설립과 동시에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한국인 과학자 18명(사진)을 유치했다. KIST 1세대 연구원 중 유일한 경제 분야 출신이었던 윤여경 경제분석실장(왼쪽 동그라미)은 종합제철 건설추진 전담반에서 김재관 박사(오른쪽 동그라미)와 함께 각각 경제적, 기술적 타당성 분석 업무를 담당하며 밤낮 없이 매달린 끝에 ‘포항제철소 종합건설 계획안’을 완성했다고 회고했다. (사진=KIS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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