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셰필드(Sheffield) 대학에서 금속공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신영길 전 포스코건설 전무가 공식적으로 포항제철의 일원이 된 것은 포스코 기술연구소 연주연구실 과장으로 입사한 1981년이었다. 그러나 신 박사가 포항제철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로부터 13년 전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금속가공연구실 연구원으로 참여한 1968년 2월이었다. KIST에서 처음 주어진 업무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낸 보고서의 연속주조 부문 번역이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포항所 부지·생산량 확대 막기 위해 고의로 협소하게 설계한 日에 반대
– KIST·포스코·RIST·포스코건설에 연달아 몸 담으며 철강과 함께한 37년
영국 셰필드(Sheffield) 대학에서 금속공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신영길 전 포스코건설 전무가 공식적으로 포항제철의 일원이 된 것은 포스코 기술연구소 연주연구실 과장으로 입사한 1981년이었다. 그러나 신 박사가 포항제철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로부터 13년 전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금속가공연구실 연구원으로 참여한 1968년 2월이었다. KIST에서 처음 주어진 업무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낸 보고서의 연속주조 부문 번역이었다.
“대학에서 연속주조를 배운 적도 없고 사전에도 없는 용어가 수두룩한 보고서를 번역하긴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보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했습니다. 영어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용어의 뜻도 알 수 없었고 공학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 그런 번역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죠. 1969년 들어 KISA의 60만 톤 계획이 무산된 뒤 독자적으로 종합제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KIST 등이 주축이 되어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거기서 제강기술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위원회에서는 60만 톤을 100만 톤으로 상향 조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그는 그 능력 계산에 들어갔다. 제철소의 공칭능력은 제강 기준이므로 제강기술을 담당한 그에게 일이 떨어진 것이었다. 제철소를 본 적도 없는 신입 연구원이었지만, 그는 독일 아헨공대의 뤼스(Lueth)와 데마그 사의 케니히(Koenig)가 공동 집필한 ‘제철소의 기획(Planning of Iron & Steel Works, 1967)’이라는 책자를 참고해 계산했다.
“우선 LD 전로를 100톤, 출강과 다음 출강 사이의 시간(Tap to Tap Time) 41분을 전제로 해서 하루 1410분, 1년 300일 조업을 하면 ‘1410분/41분=34.4출강/일, 34.4출강/일×300일/연=103만2000톤/연’이 됩니다. 매우 간단한 계산이었죠. 문제는 제철소의 공칭능력이 100만 톤이나 110만 톤이 아니고 103만 2000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KIST나 위원회의 많은 분들이 결재를 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그만큼 국내에 전문가가 없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포항제철소 1기 설비 공칭능력이 103만 톤으로 된 것입니다.”
1970년 들어 김재관 KIST 연구실장이 상공부 차관보로 영전하였고, 그 후 김철우 박사가 KIST에 부임하여 연구원들을 면접한 뒤 이들의 일본 연수를 주선했다. 이때 그는 LD 전로 메이커인 가와사키중공업에서 제강공장 설계 연수를 받았다.
“1972년 9월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뒤 KIST 연구원 신분으로 포항제철 2기 설비추진반에 파견되어 제강과 연속주조 엔지니어링을 담당했습니다. 김철우 박사는 KIST 중공업연구실장 신분으로 포항제철 기술이사 겸 2기 설비추진반을 맡아 일본의 은퇴 기술자 여러 명을 KIST에서 고용하는 형식으로 포항에 주재시켰습니다. 그들이 포항제철에 기술지도를 하면서 JG(Japan Group)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었어요. 그런데 제강, 연속주조 분야는 일본인 기술자 채용이 불가해 내가 맡았습니다.”
2기 설비 제강 능력은 220만 톤이었다. 신 박사는 일본 NKK 연수를 통해 100톤 전로이면 일본에서는 280만 톤까지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보다 20만 톤 정도만 낮추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260만 톤을 강력히 건의했다. 이에 따라 소재 밸런스를 재설정하고 모든 설비계획을 이에 맞춰 수정했다.
“제강부에서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조업을 해보기도 전에 함부로 생산능력을 높이는 것도 문제일뿐더러, 전로 1/2 조업에 100만 톤을 생산한다면 2/3 조업의 경우에는 200만 톤 이하가 되어야 정상적이라는 것이었어요. 단순 계산으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만, 설비의 시너지 효과를 감안하면 40만 톤을 더 생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어요.”
JG가 최초로 작성한 1제강공장의 연속주조는 슬래브 1기, 블룸 1기였는데,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지가 조괴장 면적 정도로 매우 협소해 설비를 배치할 수가 없었다. 이후 260만 톤 규모에 맞추어 JG가 수정 제출한 연주공장의 MEP(Master Engineering Plan)에는 슬래브 연주기 2기와 블룸 연주기 1기로 구성되어 있었고, 기존 레이아웃을 크게 바꿔 2제강공장 건설 예정 부지를 40% 이상 침범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철소는 기형이 될 뿐만 아니라 2제강공장 건설 부지가 없어지는 겁니다. 숙고를 거듭하다가 슬래브 연주기 생산성을 상향 조정하고 소재 밸런스를 약간 조정하면 슬래브 연주기를 1기로 줄여도 260만 톤 생산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출강동과 나란히 슬래브, 블룸 각 1기를 설치하고 부족한 피니싱라인(finishing line)은 아래로 90도 꺾어 설치하면 1제강공장 부지 내에서 충분히 면적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제안했어요.”
포항제철소는 본래 1, 2제강공장 모두 100톤 전로로 해서 최대 500만 톤 생산 계획이었지만, 2제강공장에 300톤 전로를 설치하면 1000만 톤까지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JG는 슬래브 연주기 2기와 블룸 연주기 1기를 설치하기 위해 2제강공장 부지를 크게 잠식함으로써, 장차 포항을 500만 톤 이상으로 확장할 수 없도록 계획해 놓은 것이었다.
“포항 제강공장 부지는 사방이 막혀 있어 확장할 수가 없습니다. 아래는 산소공장 및 국도, 우측은 중앙도로, 좌측은 제선지구, 위쪽은 석회소성공장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2제강공장 부지를 크게 잠식하게 되면 2제강공장은 300톤 전로를 설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포항제철소는 500만 톤으로 끝나게 됩니다. 반면에 제선, 압연 지구는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는 부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내부의 반대가 있었고, JG에서 만든 것을 ‘자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바꾸려 드느냐’는 힐난이 이어지면서 경영층에 보고도 되지 못했습니다.”
포스코의 성공에 JG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도와주는 한편으로 부메랑 현상을 우려해 보틀넥(bottle neck)을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당시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한일 간의 외교 관계가 얼어붙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미쓰비시에서 상업차관으로 슬래브와 블룸 연주기를 공급하겠다고 제의해 와 포스코는 그에게 검토를 맡겼다.
“미쓰비시는 올슨(Olsson)의 라이선스이고 슬래브 실적이 전무해 실격시켰습니다. 그 후 JG의 아리가 단장이 찾아와 스미토모-콘캐스트의 슬래브와 미쓰비시-올슨의 블룸을 함께 공급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두 메이커의 연주기 설계가 다르고, 우선 높이가 서로 맞지 않아 주조상(operating floor)과 반출상(discharge line)의 높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데, 세상에 그런 공장은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후 JG는 연속주조에 관한 한 그 어떤 지원도 거절했습니다.”
1973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남한이나 북한에 52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제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긴급히 연속주조를 추진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회사에서 책정한 예산은 180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JG에서 작성한 슬래브 2기, 블룸 1기에 대해 푀스트가 제출한 견적은 5200만 달러로 차관 금액 전부에 해당했다. 회사는 패닉 상태였고, 거절하면 그 차관은 북한의 비료공장으로 갈 것이었다.
“박태준 사장께서 부르시더니 지붕이 없는 공장을 지어도 좋으니 어떻게든 싸게 짓는 방법을 찾아 보라고 하셨습니다. 용기를 얻어 정명식 이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일사천리로 처리해 주셨어요. 그리고 층층이 동의를 구하려면 말들이 많을 테니 앞으로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말고 직접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까지 푀스트는 연주기 본체 실적만 몇 건 있었고 플랜트 전체를 공급한 실적이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설비이다 보니 JG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 레이아웃과 구매사양 등 엔지니어링 일체를 혼자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초의 생각대로 슬래브 1기를 줄이고 매우 조밀한 레이아웃을 제시했는데, 이에 대한 푀스트의 견적은 2800만 달러였습니다.”
이후 박태준 사장과 노중열 이사가 푀스트를 방문해 상담한 결과 2600만 달러에 계약이 이루어졌고 차관 금액도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 후 푀스트의 사양과 레이아웃을 받아보니 수처리공장 등 많은 설비가 누락되어 있었다. 적반하장으로 푀스트의 영업담당 노이바우어는(Neubauer) 박태준 사장과 며칠 내에 사양을 확정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나는 안전모로 회의 탁자를 내리치면서 후에 푀스트 회장이 된 비싱거(Wiesinger) 기술부장에게 ‘당신은 기술자로서 최소한의 양심도 없느냐’고 들이댔더니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모두 해결했어요. 1975년 5월 준공 후 연속주조공장은 기대 이상으로 생산성이 높았습니다. 엔지니어링에 자신이 생겼지만 연속주조의 이론과 기술을 심도 있게 공부하기 위해 1976년 영국 셰필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영국 정부의 장학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는데, 포스코에서 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주셔서 2년간 경제적 지원을 받았습니다. 1981년 귀국해서 포스코 기술연구소 연주연구실 과장으로 입사함으로써 처음으로 포스코 직원이 되었습니다. 기술연구소장으로 계시던 김철우 박사를 다시 만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일본 철강회사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경쟁적으로 제철소를 건설했고, 설비 메이커들은 모두 미국이나 유럽의 메이커들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기본 설계를 받아 자체적으로 상세 설계를 한 뒤 본체만 제작, 공급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예를 들어 가와사키 중공업의 LD 제강은 미국의 PECOR, 미쓰비시의 압연기는 미국의 MESTA, 히타치의 압연기는 미국의 블로녹스, 이시카와지마하리마의 압연기는 미국의 윈유나이티드, 스미토모의 연주기는 스위스의 콘캐스트 라이선스였다는 것이다.
“포항제철소는 일본의 기술과 설비를 들여와서 성공했고, 그만큼 일본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를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포스코 프로젝트는 일본 제철설비 메이커들이 본체는 물론 부대설비 등 공장 전체를 턴키 베이스로 공급하는 최초의 기회가 되었고, 포스코의 성공은 일본 메이커들이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포스코 프로젝트는 일본 메이커들의 턴키 베이스 실험 공장이었던 셈이죠.”
1985년 3월에는 포항공대 건물 설계를 맡은 미국 용역단이 내한해 박태준 회장과 만나기 전날 이대공 이사 방에서 사전 회의가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학사계획(academic plan)에 대해 질문을 했으나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미국 용역단도 같은 질문을 해 결국 박 회장의 지시로 포항공대 마스터플랜 작성에 들어갔다.
“현대가 설립한 울산대학, 대우가 설립한 아주대학 등의 전철을 밟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류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신중한 학과 선정, 연구중심대학, 소수정예, 연구시설 투자 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학과 선정의 기본 개념은 포스코에 도움이 되고 지속적으로 포스코의 보조를 받기 위해 포스코 관련 학과 50%, 물리·화학 등 기초 학과 25%로 하고 미래를 위해 하이테크 25%는 비워두었습니다. 영국 셰필드 대학의 철강기술대학원을 벤치마킹해 철강기술대학원 설립 계획도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포스코는 그동안 막대한 연구설비와 연구비를 투자했지만, 지난 30년간 포항공대가 포스코에 과연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포항공대 계획이 끝나자 곧 이어 다시 종합연구소 마스터플랜 작성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전성기의 유에스스틸(U.S. Steel) 연구소와 신일본제철의 후쓰 중앙연구소를 벤치마킹해 마스터플랜 작성에 들어갔다. 당시 포스코의 고문이었던 최형섭 전 장관이 대덕 연구단지 내에 가장 좋은 자리를 주선해 주겠다고 했지만 포스코연구소는 제철소 내에 위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조직과 설비를 설계했어요. 첫째 공정 및 시스템 엔지니어링, 둘째 제품 및 가공, 셋째 기초 및 하이테크였습니다. 후에 포스코 중앙연구소를 RIST 재단법인으로 독립시키는 데 반대했다가 혼이 났습니다. 그때 반대한 이유는 첫째 독립법인은 현장과 연구소 간의 소통과 협업에 문제가 있고, 둘째 재단법인에 투자한 자산은 나중에 국가에 귀속되기 때문이었어요. RIST가 재단법인으로 독립되는 바람에 포스코는 결국 자체 연구소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복 투자가 있었다고 봐야죠.”
1994년 8월 RIST 철강공정연구본부장으로서 김만제 회장에게 포스코건설의 엔지니어링 부문 발전계획을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주력사업이 압연, 연속주조, 표면처리이고 자체 연구개발이 불가능하므로 압연과 표면처리는 미국의 윈유나이티드, 연속주조는 영국의 데이비그룹의 연속주조 전문회사인 데이비 디스팅턴(DDL; Davy Distington Limited)과의 M&A를 건의했다.
“보고 직후 포스코건설의 전신인 PEC의 연구소장 겸 상무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후 박준민 사장과 함께 영국 데이비 그룹 회장을 만나 조인트벤처 구성 협상을 벌였으나 DDL 주식 20% 매입에 2000만 달러를 요구해 결렬되고 말았어요. 이후 나는 데이비 회장과 지속적으로 협상을 벌여 1995년 1월 DDL 주식 55%를 300만 달러에 매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스코 엔지니어링본부의 강한 반대가 있었어요. 엔지니어링이란 부문을 두고 벌인 주도권 다툼이었죠. 사실 DDL은 RIST와 스트립캐스팅 공동연구를 수년간 수행해 왔고, 세계 4대 슬라브 연주기 메이커 중의 하나로서 탄탄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광양 1-4 연주기 신설과 관련해 포스코는 이미 광양에 연주기 7대를 공급한 실적이 있는 데마그를 선호했으나 외자설비 예비견적은 데마그 370억 원, DDL 266억 원으로 100억 원 이상 차이가 났다. 1995년 2월 포스코건설의 엔지니어링사업본부가 컨소시엄 리더가 되어 견적가격 대비 66억 원 삭감된 365억 원, DDL은 297억 원에 하청계약이 이루어졌다. 곧 이어 포스코 엔지니어링 부서가 포스코건설 엔지니어링사업본부에 흡수되어 이 사업을 수행했다.
“1995년 중반 들어 포스코건설이 수행하는 사업 내자분에 막대한 적자가 예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DDL의 과잉설계에 있다고 뒤집어 씌우고 급기야는 DDL의 M&A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고까지 문제를 비화시켰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포스코 경영층에 보고가 이루어진 나머지, 연구소장인 나에게 책임을 물어 해고되었고, 포스코건설 연구소도 폐쇄되어 연구소 소속 전원이 RIST에 귀속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포스코는 그룹사 연구소장을 소집한 적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그룹사의 모든 연구는 과제 선정에서부터 수행 전반에 걸쳐 포스코 기술발전부의 통제를 받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 나는 포스코가 연구비를 지원하는 연구과제는 따르겠으나 그룹사 자체 예산으로 수행하는 과제는 그럴 수가 없다고 했어요. 포스코 기술발전부에는 포스코건설의 토목, 건축, 엔지니어링 분야 과제, 포스데이타, 포스콘의 EIC 과제 등을 검토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어 오히려 연구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일도 한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DDL이 과잉 설계를 했다는 것과 그의 해고 소식을 들은 DDL 기술자들은 자존심이 상해 20%가 사직하고, 기술이사는 데이비 그룹으로 복귀해 버렸다. 1-4 연주기 건설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나 포스코건설은 DDL 탓만 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김만제 회장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고 DDL 정상화를 위해 파견근무를 청원한 나머지 해고된 지 한 달 만에 복귀해 단신으로 영국에 주재하게 됐다. 영국 부임 즉시 DDL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더 이상의 기술자 이탈을 막는 한편 데이비 그룹이 연속주조 사업을 못하도록 소송을 제기했다.
“본사로부터 인적, 재정적으로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지 지주회사인 POSEC-Europe의 사장 겸 운전기사로서 회사를 경영하면서 DDL 경영감독과 데이비를 상대로 소송을 했습니다. 변호사 비용이 없어 직접 진술서를 작성하고 동네 변호사의 교정을 받는 식이었어요. 법률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매일 밤 늦게까지 영국법을 공부하면서 4년간 런던고등법원에서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본사에서 재정적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도 부장 전결 사항 정도의 사소한 주택임차 건 조차도 결정해주지 않아, 그 이후로는 본사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일은행 런던지점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건물을 짓고 DDL을 입주시킨 뒤 그 임대료로 포섹-유럽을 간신히 유지했다. 당시는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있던 시절이라 제일은행은 대출연장을 해주지 않았다.
“본사에 SOS를 보냈지만 돌아온 답은 ‘포섹-유럽’이 부도가 나면 포스코건설과 포스코 모두 신용등급이 하락된다‘는 경고였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겠어요. 결국 현지에서 여러 은행을 돌며 구걸하다시피 해 마감 5분 전에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그 당시에 겪은 고생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광양 1-4 연주기 건설에 대한 포스코건설의 내자 계약은 365억 원인데, 실행가는 690억 원으로 325억 원의 적자가 예상되자 96년 6월 포스코에서 감사를 실시했다. 감사 결과 포스코의 엔지니어링 부서에 설계 물량 과소 계상 및 누락, 특수장비의 사양 변경 및 누락 등의 잘못이 있다고 판단되어 152억 원을 포스코건설에 추가로 지불하게 되었다. 간접비 82억 원 누락, 수입관세 누락 및 제작단가 상승 91억 원 등 173억 원은 포스코건설 책임 사항이었다.
“감사 결과 어디에도 DDL의 잘못은 없었습니다. 그에 따라 나도 일단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유상부 회장 취임 후 ‘포스코건설과 DDL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생아다. 1달러라도 좋으니 당장 DDL을 팔든지 없애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나는 현재 광양에 연주기 2개, 인도 타타스틸에 1개가 공사 중에 있고 스트립캐스팅도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당장은 정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나를 파면시키고 DDL을 처분하라면서 버텼습니다. 항명이라면 항명이었죠.”
4년에 걸친 데이비와의 소송에서 승소하여 DDL의 나머지 45% 주식을 무상으로 인수했고, 독일 SMS와 경쟁해 벨기에 시드마 제철소에 연주기를 공급하게 되어 경쟁력 있는 회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매각 지시는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건설 중이었던 공장을 모두 준공한 뒤, 이태리 다니엘리에 450만 달러에 매각했다.
“DDL이 보유하고 있는 스트립캐스팅 특허를 포함시키면 10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지만 특허권 유지를 위해 거절했습니다. 이후 DDL을 인수한 다니엘리는 몇 년 사이에 50대 이상의 슬래브 연주기를 판매해 큰 이익을 봤습니다. 포스코건설로서는 이런 캐시카우를 버리고 만 셈이었죠. 나중에 지인으로부터 국내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된 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3년간의 소송 끝에 이집트 아르코 특수강공장 클레임을 해결한 일, 경전철 프로젝트 관련 이태리 안살도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가 있지만 포스코와 직접 관련이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어서 생략한다고 했다. 상무 1년, 전무 10년 모두 11년을 포스코건설에 재직하면서 부하가 상관이 되는 수모도 여러 차례 겪었지만 회사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고생 끝에 한건 한건 해결할 때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스스로 느끼는 성취감에 만족하며 살아온 엔지니어로서의 삶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37년간 KIST·포스코·RIST·포스코건설을 거치면서 여러 상관을 모셨지만 가장 존경스러웠던 분은 정명식 회장님이었습니다. 영국신사의 전형 같은 분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잘해서 포스코가 성공한 것을 사실이지만, 그동안 국내 철강 수요가 공급을 앞질러 판매에 문제가 없었고 이에 따라 100% 이상의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젠 수요산업 즉 건설, 자동차, 조선, 기계, 가전 등이 모두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고 중국의 도전도 만만치 않아 앞으로 포스코도 선진국이 겪고 있는 50~60%의 가동률로 생존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할 겁니다.”
신 박사는 퇴직 후 6년간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스트레스 없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지금은 경기도 광주 퇴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면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재욱<시인·작가>
▶ 포항제철 설립 당시 KIST 신입 연구원이었던 신영길 전 포스코건설 전무는 독일 아헨공대의 뤼스(Lueth)와 데마그 사의 케니히(Koenig)가 공동 집필한 ‘제철소의 기획(Planning of Iron & Steel Works, 1967)(사진 왼쪽)’이라는 책자를 참고해 포항 1기 설비의 생산능력을 계산했다. 신 전 전무는 이 책자의 74페이지(사진 오른쪽)에 나온 출강과 다음 출강 사이의 시간(Tap to Tap Time) 개념을 응용하여 103만 2000톤이라는 구체화된 생산능력 수치를 계산했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