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신일본제철의 무로란(室蘭)제철소. 포스코 1기 설비 가동에 대비한 열연공장 조업기술 연수팀 일행은 1972년 1월부터 무로란제철소에서 6개월간의 기술연수를 받고 있었다. 유문석 전 기성보도 이 기술연수에 참여하고 있었다. 연수가 막바지에 접어든 그해 6월, 박태준 사장이 연수팀을 격려하기 위해 현지에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수생들의 기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운전실에까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절차탁마’ 자세로 혼신의 노력 다한 끝에 압연조업 최고봉에 올라
– ‘생산·품질, 세계 정상’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압연인생 30년 큰 보람
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신일본제철의 무로란(室蘭)제철소. 포스코 1기 설비 가동에 대비한 열연공장 조업기술 연수팀 일행은 1972년 1월부터 무로란제철소에서 6개월간의 기술연수를 받고 있었다. 유문석 전 기성보도 이 기술연수에 참여하고 있었다. 연수가 막바지에 접어든 그해 6월, 박태준 사장이 연수팀을 격려하기 위해 현지에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수생들의 기능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운전실에까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연수생들은 반가운 한편으로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러 왔다.
“그때 연수팀에는 돌아가신 김종진 전 사장님, 이원섭 전 전무이사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무로란제철소 측에 협조를 구했습니다. 박태준 사장께서 현장에 왔을 때 전체 압연라인을 우리 포스코팀이 운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가열로에서부터 초벌압연, 다듬질압연을 거쳐 권취 공정까지 우리가 직접 수행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일본 조업요원들은 모두 뒤로 물러서고 포스코 연수요원들로만 구성된 조업팀이 전 라인을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보시고 박태준 사장께서는 매우 흐뭇해하셨습니다.”
기술 숙련도를 확실히 믿을 수 없는 연수생들에게 그 거대한 공장 전체를 맡긴다는 것은 모험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제철소 측에서 이를 승낙해 준 것은 연수에 임하는 그들의 성실한 태도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수생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출근하면 매일 30분 동안 공장청소를 도맡아 하면서 공장을 청결하게 만들어 놓았다. 선진 기술을 한 가지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는 그들의 환심을 사야 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파티 석상에서 박태준 사장님께서는 ‘우리는 개인이 아니고 공인이다. 따라서 하나라도 더 배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지금은 남의 나라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지만, 앞으로 포항제철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뛰어난 철강회사가 될 것이다. 나는 한다면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일심동체로 분발하자’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자립을 위해 종합제철이 꼭 필요한데 자본도 기술도 자원도 없는 3무(三無)의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특히 기술 후진국일수록 기술 식민지가 될 위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나는 이분이 그냥 국영기업체 사장 중의 한 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문석 전 기성보가 철강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2년 대한중공업에 입사하면서부터였다. 대한중공업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독일 상업차관으로 건설한 철강업체로서 고철을 주원료로 평로(平爐) 조업을 하는 연산 5만 톤 규모의 철강업체였다. 1970년 인천제철과 합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거기서 가열로반과 가열공정을 거쳐 주공정인 압연기술을 익혔다.
“거기서 7년 반을 일했는데 1970년 들어 동아일보에 게재된 사원 모집 광고를 보는 순간 가슴이 설렜어요. 1968년에 창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에서 기술직 사원을 모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항제철은 당시 국내에서 제일 큰 대한중공업의 몇 십 배나 되는 방대한 규모의 종합제철이라는 내용도 실려 있었어요. 더구나 채용 자격 조건이 당시 나의 경력과 나이에 딱 들어맞는 거야. 부랴부랴 이력서를 써서 등기로 보냈습니다. 주위에는 비밀로 했어요.”
며칠 후 서류전형에 합격했으니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가 왔다. 득달같이 달려가 명동성당 앞 YWCA 건물 4층에 있는 포항제철 본사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다시 며칠 후 포항제철에서 보낸 제법 큰 봉투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뜯어보니 입사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1970년 4월 1일 출근하라는 통지서가 들어 있었다.
“선진국 수준의 일관제철소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기뻤어요. 그런데 막상 포항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6·25 때 황해도에서 피난 나와 20년을 살아온 제2의 고향이 인천이기 때문이었어요. 자녀 교육이 걱정되었고 집안 친척들이 살고 있는 경인지역과 거리가 너무 먼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결심을 굳히고 나니 이내 마음이 정리되더군요.”
4월 1일은 회사 창립 2주년 기념일이었고, 포항 현지에서 공장 착공식이 있는 휴일이었기 때문에 첫 출근은 4월 2일 서울 본사로 했다. 첫 출근 당일 바로 도입교육에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의 도입교육을 통해 일관제철소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철강회사였던 대한중공업의 연산 능력이 5만 톤이었는데, 포항제철은 1기 설비만도 103만 톤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입교육 내용 중 지금도 머리에 남아있는 것은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 이야기, 고대 소아시아 지역의 흑해 주변에서 히타이트족이 철기문명을 연 이래로 세계사의 헤게모니는 철을 잘 다룰 줄 아는 민족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 철강은 산업의 쌀이라는 것 등입니다. 포항 현장으로 내려와서는 롬멜하우스 앞 광장에서 치르는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공인정신’과 ‘우향우 정신’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때 제철소 건설 사업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초기 요원들 중에는 실제로 영일만에 뛰어드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의 오버액션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때는 다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던 게 사실입니다.”
초기 건설현장에는 차도 없었고, 차가 다닐 만한 길도 없었기 때문에 모래밭을 걸어 다녀야 했다. 바닷새들의 습성인지는 몰라도 갈매기들이 공중에서 수직 낙하해 헬멧을 쪼아대다가 날아오르기도 했다. 제철소 전 부지를 포연(砲煙)이 자욱한 전쟁터처럼 만들어 버리는 모래바람은 특히 겨울철과 봄철에 심했다. 낮에 측량하고 조성한 도로가 밤새 불어댄 모래바람에 묻혀 버리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는 하는 수 없이 중장비를 동원해서 다시 조성해야 했다. 공장 부지는 해발 5m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굴착공사 초기부터 지하수를 뽑아 올리기 위해 웰포인트(well point) 공법을 도입해야 했다. 파이프를 박고 배관으로 진공펌프에 연결해서 토목공사가 끝날 때까지 24시간 지하수를 뽑아 올리면서 공사를 했다.
“가열로 2단계 굴착공사가 끝나고 지하 15m에서 웰포인트 공법을 적용해서 기초 강관파일 항타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침에 출근해 보니 3000여 평의 부지가 온통 호수로 변해버렸어요. 비상이 걸리고 소 내의 수중 펌프를 총동원해서 설치하느라 황톳물에서 수영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항타 작업 중에 지하수로를 건드리는 바람에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작업원들이 대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아쉬움은 25그루의 개척 소나무를 살리지 못한 일입니다. 롬멜하우스를 이전하면서 주위에 있던 개척 소나무를 옮겨 심고 정성껏 돌봤으나 끝내 말라죽고 말았어요.”
가열된 슬래브가 초벌압연을 마치고 다듬질압연 라인으로 달려오고 있을 때 그는 두 손이 땀에 젖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1972년 9월 16일, 역사적인 1열연 첫 통판(通板) 때의 일이었다. 일본 연수 중에 쌓은 조업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시뻘건 판이 쿵쿵 하면서 1번 압연기를 거쳐 2번, 3번 순으로 물리면서 최종 6번 압연기를 통과해 권취기에 감기고 잠시 후 강판의 꼬리 부분이 6번 압연기를 빠져나가는 순간, 누군가가 ‘성공이다’ 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그 소리가 선창이 되어 모두 함께 만세삼창을 외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해 10월 3일 준공한 1열연공장이 정상궤도에 오른 1975년 그는 압연주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78년 9월 새로 탄생되는 2열연 조업준비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2열연공장을 성공적으로 가동시킨 것은 조업준비팀으로 옮겨간 지 2년 만인 1980년 7월 1일이었다. 2열연공장은 규모가 1열연공장의 2배에 달했다. 설비도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어 크게 달랐다. 가열로는 워킹빔 타입으로 관리비가 많이 들지만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신설설비는 물론 설비합리화를 추진하는 모든 제철소가 선택하는 설비였다.
“2단의 초벌압연 1호기가 1패스(pass)이고 2호기가 3~5패스의 가역압연으로 많은 압연량을 소화할 수 있었어요. 3, 4호기는 연속압연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른바 스리쿼터(three quarter) 식이었어요. 통판시간(pass time)이 짧아 생산성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제품의 폭도 6피트의 광폭으로 평균 단중(單重) 20톤, 최대 단중은 무려 36톤에 이르렀어요. 마무리압연은 7대 연속압연이었는데, 1열연의 6대에서 문제가 되었던 과부하도 무난히 해소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2열연공장이 정상조업도를 달성한 이후부터는 생산량 증대에 만족하지 않고 조기 설비안정과 작업표준화 기틀 구축에 들어갔다. ‘생산·품질 세계정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수직 폭 압연 롤을 평면에서 공형(孔型)으로 개조해 폭 불량을 방지하고 폭 압연량을 극대화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을 기했다. 초벌압연기의 상부 가이드를 개조해 통판성을 향상시키고 고질적인 초벌압연에서의 대형 오작 발생을 근원적으로 방지하기도 했다.
“초벌압연 다음 공정으로 열연공정의 중추적인 프로세스인 다듬질압연 중에 소재가 롤에 감기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스트리퍼를 개조하고 작업 롤의 냉각 방법을 개선해 설비의 문제점을 조기에 보완하기도 했습니다. 첨단 제품인 스테인리스 강판의 흠 발생 방지에도 나름대로 기여한 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1월 15일 그는 그동안의 공로와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아 기성보의 반열에 올랐다. 기능인 최고의 영예였다. 정명식 사장이 직접 걸어준 금메달을 목에 걸고 다음날 소속 부서에서 내건 기성 탄생 축하 현수막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앞에는 지난날의 일들이 한편의 기록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환희와 득의의 순간보다는 오히려 좌절과 고난의 순간이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1972년 1열연공장을 준공하고 채 일주일도 되기 전의 일이었어요. 사상압연 운전실에서 운전 중이었습니다. 통판이 끝나고 4~5번 압연기 사이로 김이 계속 올라오는 것이 스탠드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거야. 즉시 통판을 중지시키고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피니언스탠드(pinion stand)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압연기 축수부(軸受部)에서 고열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라인에 비상이 걸리고 정비인력이 동원되어 5호 피니언스탠드를 해체해서 철야 작업으로 베어링을 교환했습니다. 정비 작업이 계속되는데도 우리는 설비 가동을 멈추지 않고 4대 압연을 이어갔습니다. 문제점의 조기 발견과 효율적인 대처가 대형 사고를 막은 것이었지. 그때 조업에서 강행한 4대 비상압연은 이후 시범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역시 1열연 조업 초기였다. 조업 초기에는 비교적 부하가 덜 걸리고 작업이 쉬운 협폭(陜幅)의 후판 압연이 많았으나, 점차 압연 강종이 확대되고 고강도의 박판과 광폭재 압연이 증가하면서 작업 난도(難度)가 높아져 갔다. 자연히 오작 발생률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사상압연 2호기에 압연소재의 선단부(先端部)가 작업 롤을 통과해 상부 보강 롤을 휘감고 돌아가면서 냉각설비가 파손되고 화재까지 발생했습니다. 동분서주하면서 불을 끄고 압연기 밑으로 들어가서 밤이 새도록 절단하고 처리했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1983년 4월 15일 1열연 2가열로 수리를 마치고 가열로에 불을 붙일 때였다. 점화봉에 불을 붙여 가열대 하부 측면 점화구를 열고 불을 붙이는 순간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노 점검 도어가 벌떡 열리면서 꽝 하고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노체와 옥외에 있는 연돌이 잔존 폐가스에 의해 폭발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악몽이 기억에 생생해요. 지금은 연기가 노 상부에 있는 연돌을 통해 배출되지만, 당시만 해도 가열로 하부에 있는 20m 정도의 연도(煙道)를 따라 연돌 밑까지 가서 배출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수리가 끝나면 노내(爐內)는 물론 연도까지 폐가스가 있나 없나를 철저히 점검해야 했는데, 그때는 경험이 없어 연도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겁니다. 그 후부터는 수리를 마치고 점화할 때는 작업표준에 입각해 철두철미하게 지적확인(指摘確認)을 하는 작업방식이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2열연공장의 초벌압연 대형 오작 사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초벌압연에서 압연 중에 발생하는 충돌은 압연소재 자체가 두껍고 중량물이기 때문에 오작이 발생하거나 안전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초벌압연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다듬질압연에서 발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워한다.
1981년 3월 9일 새벽 2시, 초벌압연 4호기 출측(出側)에 32mm 두께의 압연재가 아코디언처럼 쌓였다. 초벌압연 마지막 스탠드를 빠져나갈 때 스탠드 출측의 통판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운전자의 시야에 통판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소재의 선단부가 롤러테이블을 타고 다듬질압연 쪽으로 가야 할 것이 초벌압연기 출측 상부 스트리퍼와 충돌, 소재가 스트리퍼에 찍힌 나머지 더 이상의 진행이 어려워져 압연기 내에 쌓인 것이었다. 30분 이상 냉각수를 뿌려 식힌 후 산소 절단기로 잘라내려 했지만 절단기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궁리 끝에 고로에서 출선구가 막혔을 때 사용하는 산소 용해봉으로 철판을 녹여 끊어 내기로 했다.
“연인원 100여 명이 투입됐습니다. 20여 명의 작업원이 교대로 절단하고 끌어내고 하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8시간이었어요. 롤을 인출하고 변형된 스트리퍼를 교환하는 데도 5시간이나 걸렸어. 결국 16시간이 나나서야 겨우 조업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6시간 동안 8000톤의 생산 감소가 일어났고, 1시간당 4000만원의 기회손실로 계산할 때 6억 4000만원의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이후 사고 발생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해 ‘초벌압연 무오작’ 이라는 신화를 낳기도 했고, 초벌압연기 상부 스트리퍼와 하우징 설비도면을 수정해 1급 비밀로 취급했습니다.”
2열연공장 초벌압연기의 모터가 소손된 대형 사고는 정말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며 그는 못할 이야기를 하듯 뜸을 들였다. 90년 8월 23일 2열연공장은 전 라인이 순조로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1분, 초벌압연 2호기에서 소재가 4패스 중 꼬리 부분이 약 5m 남았을 때 전기실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상부 모터가 연기를 내뿜으며 정지되었다. 압연 라인 전체가 서 버린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380명의 작업원에 의해 24시간 가동되어온 2열연공장으로서는 전무한 대형 사고였다.
“모터 하나 고장 났다고 해서 전 라인을 쉬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초벌압연기 모터룸 2호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번쩍하고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 인천제철에서 근무할 때의 풀오버(pull over)식 2단 롤 박판압연작업이 떠올랐어요. 비상대책회의에서 모터 1대로 박판압연기 하부를 회전시켜 압하를 주어 압연하는 방법을 제시했더니 모든 참석자들이 수긍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수작업으로 롤 간격을 설정해 시험압연을 수회 거친 후, 반자동 압연을 거쳐 전자동 작업까지 별 문제없이 이루어졌습니다.”
후에 모터의 고장 원인이 메이커의 제작상 실수임이 밝혀진 뒤 공급사인 일본 미쓰비시전기에서 기술자가 급파되었다. 당일 도쿄 발 서울행 항공기 출발을 30분 연장시키면서까지 서울을 거쳐 포항으로 온 기술자 3명은 공장이 가동되고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들은 ‘이런 임기응변은 세계 전 제철소를 통틀어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1991년 10월 22일 ‘열간박판압연 분야’의 산업명장에 선발되었다. 까다로운 조건과 심사를 거쳐 정부가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匠人)으로 공인한 것이었다. 1998년 정년을 맞아 28년간 몸담았던 포스코를 떠난 후, 중국 바오산제철소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기술유출을 우려해 거절했다. 지인의 권유로 인도네시아의 후진 압연공장 조업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기초 이상의 것은 제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좋은 조건들을 뿌리치고 귀국해 영원한 포스코맨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재욱<시인·작가>
▶ 유문석 주임이 1973년 1열연공장 운전실에서 조업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유 전 기성보는 포스코 연수생과 함께 일본 무로란제철소에서 6개월 동안 열연조업 연수를 받고, 마지막 날에는 포스코 연수생만으로 열연공장을 가동했다고 말했다. |
▶ 1972년 9월 16일, 포항 1열연공장의 첫 통판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유문석 전 기성보(사진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와 동료들. |
▶ 유문석 전 기성보는 1991년 열간박판압연 분야 대한민국 산업명장에 선정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