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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이야기 59] 이정부 前 이사, ‘우리 일’ 아닌 ‘나의 일’ 마인드로 제철소 건설에 총력 다해

[남기고싶은이야기 59] 이정부 前 이사, ‘우리 일’ 아닌 ‘나의 일’ 마인드로 제철소 건설에 총력 다해

2015/11/12

이정부 전 이사는 2기 설비가 준공되고 3기 설비가 한창 건설되고 있을 때 박종태 초대 제철소장이 회사를 떠나면서 남긴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현장에서 비공식 이임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었어요. ‘토목 쪽이 고생 많다. 토목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어쩌면 교과서에나 나올 수 있는 원론적인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그분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어울려 매우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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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가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포스코 창립과 건설, 조업 그리고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도움을 준 창업세대를 비롯한 대내외 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포스코의 참된 역사를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포스코 창업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기희생과 불굴의 정신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대내외 인사들의 활약상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실>

 

– ‘최소 비용으로 최대 공장을’··· 감사 기초 확립·회사 신뢰도 제고 노력

– 17년간 건설 엔지니어로 활약하며 포항 1냉연·2후판 등 難공사 참여

– 피할 수 없었던 광양 답사 프로젝트··· 개펄에 좌초된 배 밀며 악전고투

 

이정부 전 이사는 2기 설비가 준공되고 3기 설비가 한창 건설되고 있을 때 박종태 초대 제철소장이 회사를 떠나면서 남긴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현장에서 비공식 이임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었어요. ‘토목 쪽이 고생 많다. 토목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어쩌면 교과서에나 나올 수 있는 원론적인 내용이지만, 당시에는 그분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어울려 매우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어요. 제철소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고도의 활동을 해야 하는 일터 아니겠어요. 초창기 작업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제철소를 세우는, 이른바 ‘그린필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땅을 고르고 굴착을 하고 파일을 박는 토목공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전 이사는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 복무를 마친 뒤 한국건설기술단에 근무하던 중 1970년 12월 선배의 권유로 포스코에 입사했다.

 

"당시 ROTC 출신 장교의 복무 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김신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좀 늦게 전역해서 토목설계 전문회사 한국건설기술단에서 근무하게 됐어요. 토목은 크게 설계와 공사로 나뉩니다. 저는 설계가 책과 씨름하는 창조적인 업무라고 생각했고, 공사 현장에 가더라도 구조물의 설계 과정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해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설계용역 사업이 대부분 관청 발주로서 하반기에 집중되고 상반기에는 거의 휴무상태인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그곳에 함께 있던 선배 한 분이 먼저 포스코로 가셨습니다. 후에 그 선배의 권유로 경력사원으로 포스코에 몸을 담게 됐어요. 연관단지사무부로 첫 발령이 났는데, 경상북도의 위임업무였습니다."

 

철강산업은 많은 전후방 산업과 관련이 있으므로 제철소 인근에 배후단지를 필요로 한다. 연관단지 매입·측량·조성·분양 등의 업무는 경상북도의 일이었지만, 경북도는 이를 포스코에 위임했다. 당시 분양 업무는 관리부에서 수행했고, 이 전 이사는 공사 및 기술적인 관리 업무를 맡고 있었다.

 

"연관단지를 측량하고 전체 단지를 매립해서 분양해야 했는데, 업무 편의를 위해 분양 받은 업체가 매립 작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제철소 부지가 매립을 통해 높아졌기 때문에 연관단지도 그 정도로 높여야 했어요. 그때 제철소와 연관단지 도로 설계가 나왔는데 살펴보니까 전혀 아니었어요. 토목공사는 하부구조를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를 적당히 해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보완이 불가능해집니다. 분양 받은 업체가 서류를 들고 서울에 있는 연관단지사무부로 저를 찾아오면 매우 꼼꼼하게 체크했습니다. 그건 토목의 기본에 해당하는 일이에요."

 

그는 이때 매우 꼼꼼하게 따져서 일을 수행한 것이 이듬해 1971년 9월 사장실 감사과로 옮겨 앉게 된 연유가 됐을 것으로 짐작했다. 감사과는 1972년 6월 검사역실로 개편됐는데, 그가 맡은 일은 여전히 설계, 공사 및 레이아웃 관련 업무였다.

 

"그때 정부투자기관 관리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일상감사’라는 새로운 제도가 생겼습니다. 감사란 사업이 마무리된 단계에서 거꾸로 소급해 일의 타당성 및 적부(適否)를 따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때부터는 품의 단계에서 최종 결재 직전에 감사를 거쳐야 했어요.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포스코가 최초로 시행했습니다. 당시 설계 전문회사인 SMEC에서 설계를 끝내면 건설본부에서 공사 품의를 올리고, 결재가 나면 업무부에서 건설업체와 공사계약을 체결해 공사에 들어가는 체제였어요."

 

그는 건설본부의 품의 단계에서 일상감사를 수행했다. 감사 부서에는 과장, 부장이 있었지만 토목·건축에 관련된 감사는 모두 그에게 맡겼다. 입사 전 설계회사에서 2년 반 동안 근무하면서 설계 관련업무를 책을 통해 이론적으로 독파한 그로서는 부실한 부분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기계나 정비 분야는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 기술이었지만 토목·건축은 우리 손으로 수행해야 하는 분야였기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박태준 사장은 설계가 끝났는데도 현장에서 파일 항타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무엇하고 있느냐’고 호통을 쳤어요. 그리고 공장이 준공되면 시제품 생산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상업생산에 들어가라는 겁니다. 준공 전에는 2~3일 만에 주변 녹화까지 깔끔하게 마치라고 다그쳤지요. 그러다 보니 감사에서 시간을 끌면 사장 지시를 내세우며 빨리 해달라는 독촉이 빗발치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것도 사장 지시지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장 건설’은 그에 우선하는 사장님의 기본 철학이라고···"

 

그는 감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감사가 허술하면 현장에서 아무리 원가절감 노력을 기울여도 허사가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따라서 건설공사 부문에 대한 감사 업무의 기본 틀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년 주기로 실시되는 감사원 감사의 지적사항을 크게 줄였으며, 이에 따라 포스코의 대외적 공신력을 크게 제고할 수 있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계속 공사에 있어서 가설건물 건립비, 공사감독의 차량유지비, 지하수 용출비, 가설 비계류 등의 중복 반영, 각종 할증 요율, 공사 물량 과다 산출 등을 철저히 배제한 겁니다. 예를 들면 공장 건설공사는 설비공급자가 기본 설계를 제공하지만, 도로포장 같은 공사는 국내 설계로 이뤄지기 때문에 첫 번째 발주 공사 금액에서 약 3분의 1을 절감한 재설계 금액으로 시행토록 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여러 부서로부터 미운털이 많이 박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당시 원활한 감사 업무 수행을 위해서 감사원 근무 경험자 5명을 특채하기도 했지만, 모두 업무 및 회계 쪽이었습니다. 기술 쪽은 계속 저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업무량이 너무 과중해져 1년 후 기술직을 충원했습니다."

 

감사부서에 근무하면서 엔지니어 영역의 업무를 했지만, 명실상부한 엔지니어로서의 길을 걸은 것은 1973년 10월 설계부 설계1과로 발령이 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1990년 8월 포항로공업(現 포스코켐텍) 사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무려 17년 세월을 오로지 건설 외길을 걸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반직원에서 과장, 차장, 부장, 부소장을 거쳐 임원 직위에까지 올랐다.

 

"포항 1냉연공장 토목공사 주감독으로 일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1냉연공장은 포스코에 도입된 최초의 미국 설비로서 규모 면에서 당시까지 최대의 건축면적, 최고의 높이, 최심(最深)의 굴착 깊이를 기록했어요. 토공량, 강관파일, 콘크리트 등 공사물량에 있어서도 최다였습니다. 1기 설비와 2기 설비에 걸쳐 건설된 난(難)공사를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예정 공기보다 단축하여 준공시켰어요. 이 공로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의 난공사는 역시 주감독으로 참여한 포항 2후판공장 토목공사였다. 1냉연공장이 1기 설비 종합준공과 관계없이 추진됐다면 2후판공장은 2기 설비 종합착공 이전에 별도로 착공됐다. 공장 규모나 공사물량 면에서 1냉연공장의 기록을 초과하는 공사였다.

 

"제품 냉각야드 건물 기둥과 기둥 사이 간격이 60미터, 천장크레인을 지탱하는 보(girder)의 무게가 80톤에 이르렀습니다. 트러스(truss) 구조였으면 무게를 줄일 수 있었는데 플레이트 구조였기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이만한 규모의 설비를 통째로 제작, 운반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하는 수 없이 공장에서 5개 부분으로 분리 제작해서 운반한 뒤 현장에서 용접, 조립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공사를 위해 120톤 크레인과 80톤 크레인 2대가 동원되기도 했어요."

 

광양제철소 건설에는 선발대로 투입됐다. 동력공사부와 제강공사부 차장을 거쳐 건설1부 차장으로 있던 1982년 2월이었다. 제2제철소 건설 입지는 전국 5개 지역이 경합하는 바람에 광양으로 확정되기 전에 이미 전국의 후보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측량과 지질조사를 시행한 바 있었다.

 

"저는 처가가 대구인데 아내는 포항도 시골이라고 못마땅해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 광양으로 가야 한다니 아내는 혼자 가라더군요. 생각 끝에 회사에 사표를 냈더니 본 척도 않는 겁니다. 줄줄이 학교와 토목계의 선배들로 엮여 있는데, 내 맘대로 짐을 쌀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정명식 당시 부사장께서 부르더니 광양에 다녀오라더군요. 공장 부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주택단지를 답사해서 건의하라는 겁니다. 나로서는 광양 프로젝트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광양사업소장은 심인보 당시 상무이사였다. 그 휘하에는 유상부 건설1부장, 김광남 건설 2부장이 있었다. 그는 유상부 부장 아래서 1차장을 맡고 있었고, 2차장은 이명섭 전 상무이사였다. 이 대목에서 이 전 이사는 유상부 전 회장의 고집과 뚝심을 짚고 넘어가자고 했다.

 

"정말 배짱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물론 그 배짱은 강한 소신이 뒷받침하고 있었지요. 제2제철 입지가 아산만과 광양만으로 좁혀진 상황에서 기세 등등한 신군부가 좌지우지하던 정부에서는 아산만을 밀고 있었으나 유상부 전 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아산만은 안 된다’고 버텼어요. 그때 박태준 회장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거창에서 거창한 인물이 나왔다’는 거였어요. 거창은 유 전 회장의 고향입니다."

 

광양 초기 요원들은 금호도 건설기지에 임시로 마련한 가설건물에서 기거했다. 저녁때 밖이 시끄러워 나갔다가 동네 청년들로부터 주먹세례를 받기도 했고, 이들이 상수도관을 차단하는 바람에 아침에 세수도 못하고 출근하기 일쑤였다.

 

"1982~1983년 당시 초기 요원들은 2주에 한 번씩 포항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버지가 올 것으로 믿고 버스 도착지에서 기다리다 아버지가 안 온 것을 알고 풀이 죽어 돌아서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안 가볼 수가 없는 겁니다. 포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후 1시에 망덕으로 나가는 배를 타야 했는데, 망덕에 도착하면 되돌아오라는 연락이 오는 거예요. 서울에서 고위층이 내려온다는 전갈이 도착했다는 겁니다. 정부 고위 인사들은 꼭 주말을 틈타 내려오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됐습니다. 헐레벌떡 되돌아가 가설건물에서 괘도걸이로 국무총리에게 현황 브리핑을 한 적도 있습니다."

 

가설건물 인근에는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었으므로 주말을 이용해 순천으로 나가 목욕이나 이발을 하고, 해안지역 통금시간인 6시 이전에 숙소로 돌아오려면 업무용 선박을 이용해야 했다. 당시에는 직원들의 월급도 이 선박으로 실어 날라야 했다. 말이 선박이지 조각배에 불과했다. 태인도와 망덕 사이의 조수 간만의 차는 3.5m였는데, 썰물 시간에 걸리면 수심이 얕아져 배가 개펄 속에 박히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이럴 때면 물속에 들어가 몸으로 배를 밀어서 좌초를 면해야 했다.

 

"한번은 돌아가신 장세훈 포항제철소장께서 광양을 처음 방문하셨습니다. 큰집에서 작은집을 보러 오신 셈이었죠. 섬이 많은 해안 지역에서는 바다 속의 조류가 이리저리 바뀌기 때문에 지진도(知津島) 인근에 조류측정기를 설치해 뒀어요. 업무연락선을 타고 지진도로 가는데, 배의 밧줄을 조류측정기에 걸어야 했습니다. 한쪽 발은 배에다 걸쳐두고 다른 쪽 발을 조류측정기에 올렸는데, 배가 파도에 밀려 빠져나가면서 몸이 공중에서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어요. 이때 반사적으로 조류측정기의 안전계단을 잡고 턱걸이하듯이 빠져나왔기에 망정이지 곤두박질을 쳤다면 아마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 위에 올라오니 안전화에 개흙이 덕지덕지 묻어 어찌나 무거운지 걸음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겨울철이라 몹시 추웠지만 지진도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겨우 체온을 유지했습니다."

 

광양제철소 건설 부지는 섬진강 서쪽 광양만 일대 전남지역으로 확정되어 있었지만, 한때 섬진강 동쪽 하동군 갈사리 해안 일대 경남지역으로 변경될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대형 건설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의 협조도 매우 긴요했는데, 섬진강의 모래 및 골재 채취 허가권은 전라남도가 쥐고 있었다. 당시 전남도지사는 후에 건설부장관까지 지낸 김종호 씨로서 광양 출신이었다.

 

"내가 브리핑 차트를 준비해서 전남도청으로 도지사를 찾아갔습니다. 브리핑을 받은 김 도지사는 모래 및 골재 채취 허가 이전에 조건을 달았습니다. 제철소로 이어지는 연륙교(連陸橋)를 전라도 쪽으로 먼저 내면 허가해 주겠다는 거였어요. 김 도지사는 이후 건설부 장관이 된 후에도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초기 광양 요원들이면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어업권 보상에 얽힌 주민들과의 갈등이다. 이 전 이사도 이 문제로 어지간히 골치를 앓았다고 털어놓았다.

 

"광양군·하동군·남해군 3개 지역 주민들이 흡사 경쟁이라도 벌이듯 강경자세를 보였습니다. 협상이란 우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진전이 되든 결렬이 되든 하는 것인데, 이야기 자체를 거부하는 거예요. 자료를 들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당신들은 대학 나오고 큰 회사 다녀서 유식한 모양인데 우린 무식해서 그런 것 모른다. 그러니 무식한 사람들 상대로 장난질 하지 말고 우리 요구를 그대로 다 들어주면 된다’는 겁니다. 요구에는 이중삼중의 계산이 들어있었고, 협상은 오직 떼를 쓰면 된다는 식이었어요. 특히 관행어업에 대한 보상은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 전 이사는 업무에 임할 때 ‘우리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란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의 심성에 그런 게 있죠. ‘나’가 아닌 ‘우리’가 될 때 책임감이 그만큼 약화되고 ‘내 것’이 아닌 ‘우리 것’이 될 때 소유개념이 그만큼 희석됩니다. 업무에 임할 때 ‘이건 나의 일’이라는 자세를 견지하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일’은 합(合)의 최대치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학교 때 교장선생님께서 주신 교훈입니다. ‘노력 없는 기대를 갖지 말자’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재욱 <시인·작가>

 

▶ 이정부 전 이사가 1976년 12월 2일 착공한 포항 2열연공장 3가열로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3가열로는 푸셔(pusher) 형식의 1·2가열로와 달리 워킹빔(walking beam)식이 적용돼 슬래브 간 마찰로 인한 표면 및 치수의 부정확성을 개선했다. 1978년 2월 28일 2열연공장 준공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본·독일·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4번째 광폭후판 생산국이 됐다.

 

▶ 1978년 8월 1일 포항 3기 설비 콘크리트 타설 100만㎥ 돌파 기념행사에서 이정부 전 이사(앞줄 왼쪽 두 번째)과 관계 임직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3기 설비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 공사였다. 임직원들은 그해 추석휴가를 반납하고 건설현장에서 합동 성묘제를 지내는 등 건설비상 체제에 적극 동참했다. 그 결과 포스코는 공기 만회를 넘어 예정일보다 5개월 앞선 1978년 12월 8일 3기 설비를 준공, 조강 연산 550만 톤 체제를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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